아시아의 역사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막부는 어떻게 폐지되었나? 공의정체파와 토막파의 격론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정무를 조정에 반환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사쓰마·조슈 두 번을 중심으로 한 무력 토막 세력에 맞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이 스스로 국정을 운영할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요시노부는 대정봉환 이후에도 구 막부 세력이 새 정권 운영에 계속 관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

한편, 대정봉환과 같은 날 조정으로부터 사쓰마·조슈에 토막의 밀칙(密勅)이 하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시노부의 행보가 너무나 민첩했던 탓에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에 토막파 공경들과 사쓰마·조슈 연합은 정권 탈취를 철저히 막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친정(親政)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867년에 반포된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입니다.

이 호령은 토막파에 속한 공경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중심이 되어 입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은 약 700년 만에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새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동시에, 260년간 지속된 에도 막부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쇼군(征夷大将軍)의 직위가 폐지되었고, 조정과 서국 다이묘들을 감시하던 교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와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역시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섭관 제도인 세간(摂政)과 간백(関白)의 직위가 폐지되고, 총재(総裁)·의정(議定)·참여(参与)의 삼직(三職)이 새롭게 설치되었습니다. 700년 만에 부활한 천황 친정 체제 아래, 실질적으로 정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조정의 관제가 전면적으로 재편된 것입니다.

대정봉환으로 천황 중심의 새 정부를 세우고 새 체제 아래 국정 운영을 이어가려 했던 것은 도쿠가와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막부라는 정치 운영 조직 자체가 소멸했고, 천황이 직접 정무를 주도한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선언 직후 신정부의 움직임

호령이 반포되자마자 삼직이 즉시 소집되어 교토 어궁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회의장에서는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 토막파와, 요시노부의 지위를 옹호하는 도사 번 전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부(山内豊信),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오와리 번 전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德川慶勝) 등 공의정체파(公議政体派)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회의의 안건은 구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진퇴 문제였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와쿠라 도모미 등 토막파는 요시노부가 내대신(內大臣)에서 사임하고 영지를 반환하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반면 도쿠가와 가문을 포함한 공의정체파의 야마우치 도요시게 등은 이 처분에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이때 어궁 밖을 경비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단검 하나면 충분하다"며 야마우치 도요노부를 암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회의장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결국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가 야마우치를 설득했고, 마침내 요시노부의 내대신 사임과 영지 반환(사직·상표)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이 처분이 즉시 시행될 경우 가신들이 극도로 흥분하여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며 유예를 구했습니다. 동시에 야마우치 도요노부 등 공의정체파는 오쿠보 등이 외국에 대한 포고용으로 준비한 문서 속 '국사를 논의할 제후 회의(諸侯会議)를 설립한다'는 문구에 주목하여, 앞서 열린 회의는 몇몇 번의 대표가 모인 모임에 불과해 제후 회의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결정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야마우치 도요시게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요시노부는 새로운 회의 개설에 성공했고, 요시노부의 사직과 영지 반환은 사실상 무산되었습니다. 오히려 요시노부가 새 정부의 핵심으로 복귀한다는 분위기까지 형성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조급해진 사쓰마·조슈 양번은 늘 쓰던 방법, 즉 무력 도발에 나섰습니다.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낭인들을 규합해 에도 시내 중심가에 방화를 일으키고, 약탈 등을 반복하며 막부 측을 도발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막부 군병들은 사쓰마 번 저택을 습격해 불태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막부 내부에서는 사쓰마를 토벌해야 한다는 주전론이 급격히 커졌고, 요시노부조차 이를 더 이상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도바·후시미 전투와 공의정체파의 몰락

이듬해 주전론이 마침내 실행에 옮겨지면서, 막부군은 도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에서 니시키노 미하타(錦の御旗)를 앞세운 신정부군과 충돌했습니다. 패전한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에서 탈출해 에도로 떠났습니다. 요시노부의 도주로 사쓰마는 신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공의정체파는 신정부 내에서 발언권을 잃고 결국 토막파로 노선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니시키노 미하타란? 천황의 군대임을 나타내는 깃발로, 조큐의 난 당시 고토바 상황이 처음으로 장군에게 하사한 이래, 조정이 적을 토벌할 때 정부군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이 깃발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막부 측은 공식적으로 '조적(朝敵)', 즉 조정의 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