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이 대옥 이후 계속된 과격파의 움직임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 이후, 특히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과격한 양이 논의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1859년 조약에 따라 요코하마·하코다테·나가사키가 개항된 지 한 달여 만에, 미토 번사들이 요코하마에 머무르던 러시아 장교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외국인 습격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존왕양이의 기운과 공무합체
무역 확대에 따른 물가 급등에 시달리던 여론은 개국 정책 비판으로 기울었고, 양이 사상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쿠라다몬 사건에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테러 행위는 더욱 격화되어 갔습니다.
1860년에는 해리스와 함께 일본에 온 미국인 통역관이 사쓰마 번사에게 살해당했고, 1861년에는 미토 번사 등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이끄는 조슈 번 존왕파가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이 바로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였습니다.
공무합체론자인 히사미쓰는 1862년 대군을 이끌고 교토에 입성하여, 과격한 존왕양이 운동을 혐오하던 고메이 천황에게 막부 권위 강화와 과격 행동의 억제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히사미쓰의 이러한 행보를 오해한 사쓰마 번의 과격파들은 교토의 여관 '데라다야(寺田屋)'에 모여 요인 암살 계획을 세우고 말았습니다.
히사미쓰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지만, 결국 무력 충돌로 번지면서 과격파 숙청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훗날 '데라다야 사건'이라 불린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쓰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고메이 천황의 신뢰 또한 얻게 되었습니다.
히사미쓰가 에도로 떠난 뒤, 존왕파 지사들은 다시 교토에 모였고, 이른바 '천주(天誅)'라 불리는 테러 활동이 크게 성행했습니다.
안세이 대옥 때 체포되었던 시마다 사곤(島田左近)이 존왕파에게 살해되어 목이 시조 대교(四条大橋)에 효수된 데 이어, 다음 해에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와 함께 공무합체를 추진하던 치기가 아유후미(千種有文)의 가신이 암살당했습니다. 시신의 일부는 이와쿠라의 저택에 던져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과격파 지사들의 배후에는 도사 번과 조슈 번이 있었습니다.
신선구미의 탄생
테러의 온상이 되어버린 교토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1863년 하나의 조직이 탄생했습니다.
미부 로시구미(壬生浪士組), 훗날 '신선구미(新選組)'라 불리게 될 조직입니다.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는 이들에게 무사들의 난행 단속과 치안 유지를 맡겼으며, 같은 해 일어난 8월 18일 정변에서의 활약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 등을 거치며 수많은 과격파 지사들을 숙청해 나갔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좌막파(佐幕派)의 상징이 되었고, 존왕파 지사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존왕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신선구미는 후시미 유흥가, 기요미즈데라와 야사카 신사가 위치한 히가시야마 북부, 니시혼간지 주변, 그리고 현재 교토역 서쪽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며 단속에 나섰습니다.
본거지였던 마에카와 저택(前川邸)에서는 많은 대원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도 벽면에 남은 낙서와 검흔이 그 흔적을 증언합니다. 신선구미는 교토 최고의 검술 집단으로서 치안 유지에 분투했지만, 교토 사람들의 눈에는 시골 출신 로닌 무리에 불과했고, '미부의 늑대(壬生狼)'라 불리며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토 경비에 함께 투입된 교토 미마와리구미(京都見廻組)는 막신(幕臣)으로 구성된 정규 조직이었던 반면, 로닌 출신인 신선구미는 아이즈 번 관리(会津藩預かり)라는 비정규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