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하극상'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호조 소운(北条早雲)입니다. 그는 무명의 낭인 신분에서 출발해 사가미 지역을 손에 넣었고, 그가 개창한 고호조 씨(後北条氏)는 5대에 걸쳐 약 100년간 관동 일대를 다스렸습니다.
하극상의 또 다른 대표 주자로는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있습니다. 그는 승려와 기름장수로 생계를 꾸리던 무명의 처지에서 출발하여, 1554년경 미노국의 슈고 다이묘였던 도키 가문을 축출하고 다이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다이묘까지 올랐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뒷이야기는 크게 갈렸습니다. 호조 씨는 5대에 걸쳐 100년의 번영을 누린 반면, 사이토 도산은 아들에게 패배했고, 결국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이토 가문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영주로서의 통치 방식, 즉 민정 중심의 경영 철학의 차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 증거로, 호조 씨가 멸망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구 호조 영지를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땅을 통치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여전히 호조 씨를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였던 것은 성하마을의 산업 진흥과 상인 보호 정책으로, 당시 전국 다이묘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호조 소운이 만든 오다와라 성하마을
고호조 씨의 시조인 호조 소운은 오다와라 성을 거점으로 삼아 마을 조성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마을 행정을 담당할 마치부교(町奉行)를 설치하면서, 무사가 아닌 상인이나 숙련 장인을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오다와라에 새 마을을 세우기 위해 전국 각지의 상인들에게 이주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공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기 십상인 전국시대에,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어떤 상인도 감히 찾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상인을 유치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락이치 락자(楽市楽座)'였다면, 호조 소운은 전혀 다른 발상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하마을 전체를 성벽으로 두르는 것!"
즉 중국식 성곽 도시를 본뜬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국 다이묘들의 성 안에는 마을이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오면 마을은 순식간에 불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다와라는 마을 전체가 성벽과 이시가키(石垣)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호조 영주가 상인과 서민의 마을까지 성벽으로 지켜준다"는 소문이 각국에 퍼지면서, 오다와라로 몰려드는 상인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님이 지켜주니 안심하고 장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오다와라 성하마을에는 상업 거리가 빼곡히 들어섰고, 각종 특산물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문을 열었습니다.
상인들은 점점 더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마을에 대한 애착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마을을 청소하는 자발적인 움직임도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오다와라는 먼지 하나 없는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했습니다.
이러한 통치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성주인 호조 씨를 향한 경모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명장 다케다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와라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찰병을 오다와라에 보낸 신겐은 "공격했다가는 목숨을 잃는다"며 군을 물리는 신중함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마저 철군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다와라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호조 소운이 내세운 민정 중심 통치와 상인 보호·육성 정책이 가져온 결실이었습니다.
소운의 인생 대부분은 방랑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행하며 '세상에서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사가미국 오다와라에서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소운은 다이묘가 백성을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다이묘와 상인이 하나가 되어 백성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 정책은 자손들이 충실히 계승하여, 히데요시가 공격해 올 때까지 100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유산은, 그 영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후일 크게 괴롭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