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전면전으로 인한 상처가 깊어 승전국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국력이 바닥나 있었고, 전쟁 비용으로 인한 국민의 부담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전쟁 비용 부담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
패배한 러시아 역시 혁명의 기운이 거세지면서 국내 정치가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혁명의 영향이 자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합의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본의 한국(대한제국) 지배 이익 인정
-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받았던 여순(뤼순)·다롄 조차권과 장춘 이남 철도 권리를 일본에 양도
-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및 부속 도서 양도
- 러시아 연안과 캄차카에서의 어업권 인정
여기에 더해 일본은 러시아에 15억 엔의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러시아의 강경한 거부에 부딪혀 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히비야 폭동의 발생
강화 조약으로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쟁 중 세금 인상과 물가 급등으로 생활의 고난을 견뎌온 국민들의 반발은 격렬해졌습니다. 조약이 체결된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강화 조약 반대 국민 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 해산 후 군중은 경찰서, 파출소, 노면전차, 정부계 신문사 등을 습격하는 폭동, 이른바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소요로 인해 군대가 출동하고 도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지만, 소요는 전국으로 번져 요코하마와 고베에서도 강화 조약 반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련의 폭동으로 17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311명이 소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소자 대부분은 장인(職人)처럼 도시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폭동은 국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승전 보도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배신당했다고 느낀 국민들이, 치른 수많은 희생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결과였습니다.
계원(桂園) 시대의 정치적 안정
영일 동맹부터 러일전쟁까지 일본의 국정을 담당한 것은 가쓰라 다로 내각이었습니다. 그동안 야당에 머물렀던 입헌정우회는 철도와 항만 확장을 내걸고 지역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1905년 말 가쓰라 내각이 총사퇴하자, 입헌정우회 총재 사이온지 긴모치가 내각을 조직하여 철도망을 통일하기 위한 철도 국유화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가쓰라와 사이온지가 교대로 집권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계원 시대(桂園時代)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번벌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원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계원 시대에 일본은 군비 경쟁에 힘입어 제강·조선 등 중공업 분야의 산업혁명을 이루었고, 재벌은 각 분야의 기업을 지배하는 콘체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배상금을 받지 못한 탓에 국내외 공채의 막대한 압박과 수입 초과로 만성적인 불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불황 속에서 국민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고, 노동 운동과 사회 운동이 결합하면서 다이쇼 정치 위기의 토대가 형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