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국민 통제

앞선 글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에서는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연합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미국 등 연합국과 맞서 싸우는 일본의 상황은 '총력전'이라 불릴 만큼 국가 전체가 전쟁에 매달린 상태였습니다.

태평양전쟁 이전인 1938년, 정부는 이미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두었습니다. 이 법은 "국가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자금, 물자, 설비, 노동력을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군사 작전에 의한 전투뿐 아니라 국가의 경제력·산업력·노동력 전부를 전쟁에 쏟아붓는 것이 국시였던 셈입니다.

이어 1939년에는 국민징용령이 시행되어 일반 국민도 강제로 소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전쟁 수행을 위해 각종 통제 명령이 잇따라 발령되었습니다.

물자 통제와 배급제

격전기에는 군수 물자 생산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식량과 생필품 생산은 크게 줄었고, 쌀·된장·면포·간장 등은 배급제로 공급되었습니다. 먹고 입을 것조차 원하는 만큼 살 수 없었고, 배급받는 양도 극히 적었으니 국민 생활이 날로 궁핍해졌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민(신민) 통제

정부는 전쟁을 더욱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반전 세력이 국민 속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국민 통제를 위한 법령을 서둘러 정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치안유지법의 개정입니다. 원래 1928년 당시 긴급칙령을 통해 국체를 변혁하려는 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는데, 정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41년 다시 개정했습니다.

개정의 핵심은 전과자나 앞으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까지 미리 구금할 수 있도록 한 것(예방구금)입니다. 이로써 국가에 '불편한' 사람들은 사회에 나타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검열이 한층 강화되어, 신문·출판물을 통해 반전이나 반정부를 부추기는 등 정부에 불리한 정보는 철저히 짓눌렸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라디오로 전황을 들으며 대본영 발표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도 마치 일본이 잘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방송했기 때문에, 당시 국민들이 전쟁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 시기 일본의 총력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합니다. 성년 남성이 전장으로 끌려갈 때 받던 통지서가 바로 이른바 '아카가미(붉은 종이)', 즉 붉은색 소집 영장이었습니다. 이 적지로 인해 많은 장정들이 전장으로 떠났고, 공장에는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나이 이상의 남녀까지 공장으로 동원되는 노동 동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정부는 전쟁 수행에 불리한 정보가 퍼지지 않도록 국가 전체를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국민(신민)들의 속내

그렇다면 이런 사회 속에서 국민들은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병력 부족이 심해지면서 국민 징용의 범위는 문과 계열 대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또한 공습이 격해지자 아이들을 전화(戰禍)로부터 지키기 위한 학동 집단 소개(疏開)도 빈번해져, 지방의 숙소나 절로 집단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물자는 없고, 전선의 실상은 알 수 없고, 공부해야 할 나이에 전장으로 끌려가며, 학동 소개로 부모와 자식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정부는 이런 상황이 국민의 전의(戰意) 상실로 이어질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물자의 절약과 전의 고취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힌 포스터를 곳곳에 내걸었습니다.

  • "욕심내지 맙시다, 승리할 때까지"
  • "사치는 적이다"
  • "미국·영국은 귀축(鬼畜)이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생활 속에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이미 전쟁에 대한 회의와 피로감이 퍼져 있었습니다.

미국의 준비

진주만 기습으로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면에서 일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위에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 국민 사이에 번지는 전쟁 피로감과 달리 최종 결전을 향해 착실히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사이판·티니안·괌을 차례로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세 섬에 마련된 일곱 개의 비행장을 활용해 일본 본토 공격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탈환되기 전까지 이 섬들의 비행장은 일본이 미국과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건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비행장이 오히려 미국에 의해 일본 본토 공격 기지로 쓰이게 되었으니, 실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미군의 작전은 군사적 가치가 없는 섬까지 일일이 공격하지 않고,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거점만을 선택하여 제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덕분에 그 밖의 섬들에는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 병사들은 느긋하게 농사를 지으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듯했습니다.

전쟁의 역사를 배우다 보면 비참함과 피해에만 시선이 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도 이런 이면이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서뉴기니 전역에 동원된 일본군 병사가 공격해 오지 않는 미군 항공기를 올려다보며 씩씩하게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마무리하며

지금도 전후 배상 문제 등을 두고 '전쟁 책임'이 묻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의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 전쟁을 주도한 정치·군부 지도층인가?
  • 전쟁을 막지 못한 국민인가?
  •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전쟁 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전쟁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역사를 배우는 일은 단순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을 넘어, 이러한 현대적 질문들을 마주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