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시대가 시작되기 전, 고다이고 천황은 어떻게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을까요? 원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의 관점에서 글을 쓰려 했지만, 막부의 근간을 이루는 '고케닌 제도'에 대해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가마쿠라 시대를 지탱한 핵심 제도인 '고케닌'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쇼군과 고케닌 사이에 은혜와 봉사로 연결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고케닌'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마쿠라 시대에 처음 등장한 호칭이라는 점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케닌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고케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궁금할 만한 부분을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고케닌이란 무엇인가?
고케닌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가마쿠라 시대의 경우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은 사람을 고케닌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주종 관계를 맺은 무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주종 관계를 맺은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물론 무사 출신이 대다수였지만, 의외로 문관 고케닌이나 여성 고케닌도 존재했습니다(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
고케닌의 기원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리토모 본인이 겐지(무사)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장에서 활약하는 무사들이 자연스럽게 다수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사에 국한되지 않던 '고케닌'이라는 호칭이 점차 무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 변화해 갔습니다.
고케닌 제도의 시작
원래 귀족이나 무사 영주를 섬기는 사람들을 '케닌(家人)'이라 불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본래 정치 세계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아버지가 헤이지의 난에서 패배한 탓에 유배 생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무사 영주라고 해도 따를 가신이 많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무사하면 충성을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지만, 이는 에도 시대에 미카와 무사들의 이념과 주자학이 중시되면서 생긴 인상입니다. 그 이전에는 주종 관계가 개별적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아버지 시절의 가신이 반드시 요리토모에게 복속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다이라 씨를 타도하라는 명령이 고시라카와 법황의 황자(모치히토 왕)에 의해 발령된 것입니다. 요리토모는 그 거병 소식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헤이케는 거병한 겐지 일파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리하여 33세였던 요리토모는 이즈국의 재정착세력인 목대(目代)를 토벌하고 정치 개시를 선언하며 거병했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조정의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많은 무사가 '헤이케는 조적(朝敵)'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 목대 대신 실질적인 정치 운영이 가능한 인물로서 요리토모의 역량을 알아보았다
- 헤이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한몫했다
* 참고로 요리토모가 후세에 평가받는 부분은 무장으로서가 아니라 정치가로서입니다. 전투에서의 활약은 동생 요시츠네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겐지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그의 가신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많이 몰려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주목받고 있던 요리토모는 목대를 토벌하면서 헤이케 적대 세력 안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완전히 도약하게 됩니다. 급증하는 가신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겐페이 전쟁이 계속되면서 간토 지역 밖의 전투에서 무사들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도 닥쳐옵니다.
이렇게 해서 고케닌 제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185년(또는 1192년)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고 난 후에도 고케닌 제도는 가마쿠라 막부 체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고케닌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고케닌이라고 하면 '권호코(権兵衛)'나 '이자 가마쿠라(いざ鎌倉)' 같은 표현이 떠오릅니다. '이자 가마쿠라'는 무슨 일이 생기면 여러 나라의 무사들이 가마쿠라로 모여든 데서 유래한 말로, 노(能)의 대본인 우바슈트(謡曲)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고케닌은 전투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 공에 상응하는 영지와 직책을 쇼군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즉, 은혜(御恩)와 봉사(奉公)의 관계였습니다.
겐페이 전쟁이 확산되면서 요리토모는 근거지인 간토 지역 바깥에서도 은급을 주고 영지를 보증하는 조건으로 고케닌을 모집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여전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영지를 보증받는 것만으로도 큰 매력이 있었습니다.
고케닌이 되는 방법
먼저 군역이나 잡역(番役) 등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고, 최소한 하나의 영지를 보유하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 현대로 치면 신분증에 해당하는 명부(名簿) 또는 묘부(名符)를 제출하고 쇼군을 배알하는 의식(参謁)을 거쳐야 했습니다.
일찍부터 동국에서 고케닌이 된 사람들은 위 의식을 거치고 영지 안분(安堵)을 받았지만, 초기부터도 절차가 간소화된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고케닌이 된 서국(西国) 출신의 경우에는 수호를 통해 이름만 제출하는 간소한 절차로 가신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영지 안분을 받지 못한 고케닌도 많았고, 이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국에서는 장원 영주의 권력이 여전히 강하고 막부의 위광이 미치기 어려웠던 점이 고케닌 이탈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험난한 환경에서 고케닌의 기본 임무는 전투와 경비였습니다. 의식을 간소화해야 할 상황도 충분히 있었겠죠.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배알 의식도 단순히 예를 표하는 것만으로 축소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 후의 고케닌은 어떻게 되었나?
최소 요건에서 알 수 있듯이 고케닌의 수는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많지 않았고, 의외로 한 국(國)당 1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하면 몽골 침입(원구)이 떠오르는데, 이 정도 숫자로 외부의 위기를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막부는 고케닌이 아닌 무사들에게도 지휘를 내렸습니다. 물론 이탈한 고케닌도 있었습니다. 이후 막부가 몽골 침입으로 궁핍해진 고케닌들을 특별히 우대하면서 비고케닌과의 갈등이 깊어졌고, 이것이 반막부 움직임(막부타도 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겐무의 정변으로 겐무 신정이 시작되면서 무사 정권의 흔적이기도 한 '고케닌'이라는 호칭은 폐지됩니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 다시 사용되기도 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막신(幕臣)의 호칭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