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벼농사의 도입과 야요이 문화의 탄생 <기원전 10세기?~서기 3세기?>

벼농사의 도입 배경

일본 열도에서 조몬 문화가 이어지던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약 기원전 6500년~5500년 무렵 황하 중류 지역에서 조·피 같은 곡물을 재배하는 농경 문화가 시작되었고, 양쯔강 유역에서도 벼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철기 사용이 널리 보급되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농업이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에는 강력한 통일 국가인 전한(서한)이 성립합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이러한 대륙 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조몬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 무렵, 북부 규슈에서 물을 대어 경작하는 벼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수전(水田)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야요이 문화가 서일본에서 탄생하여 점차 동일본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홋카이도와 난세이 제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가 식량 채집의 시대에서 식량 생산의 시대로 넘어간, 기원전 4~3세기 무렵부터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부릅니다.


야요이 문화의 특징

야요이 문화는 많은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는 벼농사(후반기에는 밭농사도 발달했습니다)를 기반으로 하며, 철·동·청동 등 금속기를 사용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들여온 돌도끼, 벼를 베는 석겸 같은 석기와 방직 기술도 활용되었습니다. 음식을 조리하는 토기 역시 호(항아리)·옹(독)·고배 등 붉은 간을 바른 토기로 바뀌었는데, 이를 야요이 토기라고 부릅니다.

수전 벼농사나 금속기 제작 같은 새로운 기술은 대륙에서 도입된 것이지만, 토기 제작·석기 제작·수혈식 움집 같은 기술은 조몬 문화를 계승한 것이었습니다.

벼농사로 식량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 시대의 논은 현재의 것보다 작았지만 관개와 배수 시설은 상당히 정교했습니다. 이미 모내기도 이루어졌고, 농기구는 나무로 만든 쟁기와 괭이를 사용했으며, 수확은 석겸으로 했습니다.

수확한 벼는 고상식 창고나 저장용 구덩이에 보관했습니다.

야요이 문화가 어느 정도 확산되자, 나무 농기구에서 점차 도끼·낫 같은 철제 도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석기는 사라지며 철기가 주류가 되었습니다.

수렵과 어로도 계속되었고, 돼지를 사육하기도 했습니다.

주거는 수혈식 움집이 일반적이었으며, 취락은 점차 커져 주변에 깊은 해자나 흙둑을 둘러친 환호 취락도 등장했습니다.

죽은 자를 묻는 방식도 조몬 시대의 굴신매장(무릎을 구부린 자세)에서 바뀌어, 마을 근처 공동묘지에 옹관묘·목관묘·돌널무덤 등으로 시신을 곧게 펴 묻는 신장매장이 이루어졌습니다.

* 신장매장: 시신을 구부리지 않고 곧게 펴서 묻는 방식.

또한 낮은 흙무덤 주위에 해자를 판 방형 분구묘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 등 분구묘가 널리 나타난 점도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야요이 시대 후반에는 상당히 큰 분구를 가진 무덤까지 등장했습니다.

그중에는 거울과 청동기 무구가 30점이 넘게 부장된 대형 무덤도 있는데, 이는 집단 안에 신분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각지에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나라(쿠니)의 시작

야요이 시대에는 환호 취락이 출현했고, 석기와 더불어 철제 무기도 등장했습니다.

각지 취락에 농경 사회가 자리 잡으면서 비축된 잉여 식량을 둘러싼 다툼이 시작되었고, 무기와 방어 시설이 발달했습니다.

비교적 다툼이 적었던 일본 열도에서도 이렇게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고, 여러 강력한 취락이 통합되어 '국(쿠니)'이라 불리는 정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야요이 시대에 곳곳에서 확인되는 대형 분구묘 다수는 이들 국을 다스린 소국의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소국 분립의 모습은 당시 중국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한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의 '왜인(倭人)' 조에는 왜의 땅에 100여 개의 나라가 있으며, 종종 한반도를 통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서기 57년 노국(奴國)의 왕이 후한의 광무제로부터 인수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금인은 실제로 후쿠오카시 시카섬(志賀島)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 소국들은 중국과 한반도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일본 내에서의 지위를 높이고, 대륙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야요이 시대의 핵심 포인트!

  • 농업: 수전 벼농사가 중심(수렵·채집도 병행)
  • 수확물은 고상식 창고와 저장 구덩이에 보관(→ 수확량에 따른 빈부 격차가 나타나기 시작)
  • 더 얇고 단단한 붉은 간의 야요이 토기 등장
  • 해자와 흙둑을 둘러친 환호 취락 등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
  • 후기에 철기가 보급
  • 말기에 강력한 지배자 등장
  • 대형 무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소국(쿠니)이 탄생

야마타이국

220년, 중국 대륙에서 후한이 멸망하고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시대의 사서인 『삼국지』의 '왜인전(倭人傳)'에 따르면, 2세기 말 왜국에서는 큰 내란이 일어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이 다툼을 수습하면서, 야마타이를 중심으로 약 30개 소국의 연합 정권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히미코는 239년 중국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수많은 동거울을 하사받았습니다. 히미코는 주술적 능력을 배경으로 정치를 행하는 무녀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야마타이국에서는 이미 성인(大人)과 하호(下戶)라는 신분 구별이 존재했고, 어느 정도의 통치 체제와 세금·형벌 제도가 갖춰져 있었으며 도시도 발달해 있었다고 합니다.

히미코 사후에는 남자 왕이 통치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히미코의 딸인 이요(壹與)가 왕이 되어 다스렸습니다. 대륙에서는 266년 위 대신 '진(晉)'나라가 세워졌고, 이요가 진에 사신을 보낸 뒤 중국 사서에서 일본에 대한 기록은 약 150년간 사라지게 됩니다.

이 기록 공백기인 4세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두고 규슈설과 기나이설 등 수많은 학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었으니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