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 후반에는 소국을 다스리던 지배자들의 대형 봉분 무덤이 여러 곳에서 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3세기 후반부터는 주로 서일본을 중심으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같은 더욱 거대한 고분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분 내부에는 목관을 안치하는 세석축(竪穴式石槨) 계열의 매장 시설이 마련되었고, 수많은 동거울(銅鏡)을 비롯한 다양한 부장품이 함께 넣어졌습니다. 이러한 무덤들은 각지에서 지배자의 무덤으로 축조되었으며, 그중 가장 큰 고분들은 나라현의 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연합을 야마토 정권이라고 부릅니다.
고분의 특징
고분에는 전방후원분, 원분(圓墳), 방분(方墳)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가장 많았던 형태는 전방후원분과 원분이며, 대형 고분은 모두 전방후원분이었습니다. 고분 주변 경사면에는 하니와(埴輪)가 줄지어 세워졌고, 경사면 일부는 잇돌(葺石)로 덮였으며, 주위를 도는 해자가 설치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니와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원통형 하니와 외에도 가옥형, 방패형, 기누가사형(衣笠形) 등 다양한 모양이 만들어졌습니다.
매장 시설로는 고분 시대 중기까지 세석축에 안치된 목관이나 돌널(石棺), 관을 점토로 덮은 점토관 같은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이 보급되었고, 부장품도 동거울이나 팔찌 같은 제의적 물건이 많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철제 무기와 갑주가 크게 늘어나면서 무인적인 색채가 강해졌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고분으로는 인토쿠 천황릉(대선릉 고분, 大仙陵古墳)을 꼽을 수 있습니다. 총길이가 486m에 달하고 2~3겹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대형 고분은 5세기 야마토 지배층의 왕(大王)의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대형 고분 비교
| 순위 | 고분명 | 위치 | 시기 | 총길이(m) |
| 1 | 대선릉 고분(大仙陵古墳) | 오사카 사카이시 | 중기 | 486 |
| 2 | 곈다고묘야마 고분(譽田御廟山古墳) | 오사카 하비키노시 | 중기 | 425 |
| 3 | 가미이시즈 미산자이 고분(上石津ミサンザイ古墳) | 오사카 사카이시 | 중기 | 365 |
| 4 | 쓰쿠리야마 고분(造山古墳) | 오카야마시 | 중기 | 360 |
| 5 | 가와치 오타카야마 고분(河內大塚山古墳) | 오사카 마쓰바라시 | 후기 | 335 |
| 6 | 고조노마루야마 고분(五條野丸山古墳) | 나라 가시하라시 | 후기 | 318 |
| 7 | 시부야무카이야마 고분(澁谷向山古墳) | 나라 덴리시 | 전기 | 302 |
| 8 | 하세미산자이 고분(長谷ミサンザイ古墳) | 오사카 사카이시 | 중기 | 288 |
| 9 | 나카쓰야마 고분(仲津山古墳) | 오사카 후지이데라시 | 중기 | 286 |
| 9 | 작산 고분(作山古墳) | 오카야마 소자시 | 중기 | 286 |
| 10 | 하시하카 고분(箸墓古墳) | 나라 사쿠라이시 | 전기 | 276 |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총길이 250m를 넘는 대형 고분 대부분은 고분 시대 중기에 조영되었으며, 오사카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분 시대의 생활
이 시대에는 지배자인 호족(豪族)과 피지배 백성의 생활이 뚜렷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호족들은 백성들의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해자와 울타리를 두르고 저택을 지어 살면서 정치와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반면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는 해자가 없었으며, 여러 개의 수혈식 주거(竪穴住居), 평지식 주거, 고상식 창고 등으로 이루어진 몇 개의 집단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토기는 시기 중기까지는 야요이 토기가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야요이 토기를 계승한 하지 토기(土師器)가 쓰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전래된 회색 스에 토기(須惠器)도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장을 보면, 남자는 상의와 승마용 좁은 바지 형태의 하카마(袴)를 입었고, 여자는 상의와 치마 형태의 하카마를 입었습니다.
농사를 위한 제사는 야요이 시대뿐 아니라 고분 시대에도 중요하게 여겨져, 풍년을 비는 기년제(祈年祭)와 수확에 감사하는 신상제(新嘗祭)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잘 솟아오른 원추형 산, 큰 나무, 거대한 바위, 바다의 외딴 섬 등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물도 제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매장 시 부장품에도 변화가 나타나, 동거울 외에 철제 무기나 농구(農具) 등이 함께 부장되었습니다.
야마토 정권의 정치 체제
5~6세기에 걸쳐 대왕(大王)을 중심으로 한 야마토 정권은 간토 지방부터 규슈 중부에 이르는 지역 호족들을 포괄하는 지배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 통제 체계는 혈연 등의 관계를 기반으로 우지(氏)라는 조직으로 편성하고 역할을 분담시키는 씨성 제도(氏姓制度)를 토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정치는 대왕을 중심으로 임명된 오오미(大臣)와 오오무라지(大連)가 핵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 아래에서는 토모(伴)와 베(部)라 불리는 집단을 이끌며 재정, 군사, 제사, 외교 등의 업무를 맡았습니다.
대왕 권력의 확장은 지방 호족들의 저항에 자주 부딪혔습니다. 6세기 초에는 신라와 관련하여 규슈 쓰쿠시 지방의 호족 이와이(磐井)가 일으킨 이와이의 난이 약 2년간 이어졌고, 이를 진압한 뒤 그곳에는 미야케(屯倉)가 설치되었습니다.
이처럼 야마토 정권은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배제하면서 직접 지배를 강화해 나갔고, 그곳에 나시로(名代)와 고시로(子代)를 두었습니다. 6세기에는 지방의 실력자들이 대왕에 의해 국조(國造)로 임명되어 지방 지배를 보증받는 한편, 대왕 곁에 자녀 등을 시종하게 함, 지방 특산물 납부, 군사 작전 참여 등의 의무를 부과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호족들은 자신의 사유지인 타소(田莊)와 그 백성을 확보하여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