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9일,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입니다.
원폭 투하를 상징하는 '히로시마'라는 표기
히로시마라고 하면 프로야구 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 모미지 만주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라고 표기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배운 적이 있다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원폭 피해를 다룰 때 도시 이름을 가타카나로 쓰는 관례가 있습니다. '히로시마'라는 표기에는 특별한 의미, 즉 '원자폭탄이 투하된 장소'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도시의 이름을 상징하기 위해, 원폭 투하를 언급할 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가타카나로 표기해 왔습니다.
원자폭탄 개발의 흐름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추축국과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 간의 대결 구도로 전개되었습니다. 실제로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한 것은 미국이지만, 영국·소련·독일·일본 역시 원자폭탄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들 가운데 당시 원자물리학에서 가장 앞서 있던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유대인 박해 정책을 펼치며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과학자들은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행보에 위기감을 느낀다"며 경각심을 공유했습니다.
레오 실라르드 등 유대인 과학자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연구를 건의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은 초기에는 독일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가 검토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왜 하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을까? 투하 결정의 배경
원자폭탄 투하 여부는 연구에 참여한 군 관계자와 과학자들이 논의했고, 투하 도시는 대통령이 승인하는 절차로 결정되었습니다.
원폭 투하 후보지의 조건
적국에 폭탄을 투하하는 이상 파괴 효과가 가장 큰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보지 조건은 '인구가 밀집하고 직경 5km 이상의 도시 지역', 그리고 '8월까지 공습을 받지 않은 도시'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군 관계자와 과학자들은 우선 교토를 투하 후보지로 올렸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투하 후보지 선정에서 군사 시설의 유무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관계없는 많은 시민을 의도적으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사 시설이 거의 없는 교토에 원폭이 떨어진다면 국제 사회로부터 반드시 비판을 받을 것이고, 미국의 이미지가 나빠져 국익에도 어긋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또한 교토에는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폭격 대상은 '히로시마'와 '고쿠라'였을 뻔했다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원자폭탄 투하 도시는 히로시마시, 고쿠라시(후쿠오카현), 나가사키시로 결정되었습니다.
특히 히로시마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라 폭발 효과가 크고 원폭의 위력을 측정하기에도 적합해 첫 번째 투하 장소로 정해졌습니다. 물론 많은 시민이 살고 있었지만, 히로시마항이 군수품 보급 기지였고 군사 도시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반대할 명분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실전에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습니다.
미군은 즉시 두 번째 투하 준비에 착수하고 목표지 고쿠라로 향했습니다.
8월 9일,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날 공습을 받은 인근 도시의 대화재 연기가 고쿠라 시내를 뒤덮어 투하 목표물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고쿠라에 대한 투하는 포기되었고, 폭격기는 예비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원폭 투하가 남긴 영향
원폭 투하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열선, 폭풍압, 방사능 피해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폭심지 인근에서는 막대한 열기로 인해 사람들이 증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원폭 투하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정말 원자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논의가 여러 번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이 주장한 투하 이유
미국은 "본토 결전을 피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하며, 많은 미국인들도 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폭 투하 직전까지 일본은 이미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100개가 넘는 도시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고,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원폭 없이도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왜 원폭 투하 전에 항복하지 않았을까?
항복은 연합국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국체 보호', 즉 나라의 형태(천황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항복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 요구는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면 천황이 전범으로 재판받고 천황제가 폐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국체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일본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였습니다.
미국이 원폭 투하를 선택한 이유
일본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 중에는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항복 조건을 수정하는 편이 원폭 투하보다 낫다"며 대통령에게 진언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존재합니다.
실제 투하를 통해 위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실험만으로는 도시와 인체에 미치는 피해를 알 수 없었기에, 실제로 투하하여 데이터를 수집하고 싶었다는 설입니다.
소련에게 원자폭탄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같은 연합국이면서도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은 소련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주도하려 했다는 견해입니다.
마무리하며
원자폭탄의 개발부터 투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관여했고, 투하 이유에도 여러 정치적 사정이 얽혀 있어 무엇이 진실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원폭 투하를 계기로 세계는 핵 개발 경쟁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