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일본에 총이 처음 전해진 것은 언제, 누구 때문이었을까? – 1543년 종자도에서 시작된 총기 도입의 역사

총이 일본에 전해지기 전, 일본의 전쟁(일본어로 '이쿠사(戦)')은 일반적으로 창이나 활로 승부를 냈으며, 설에 따르면 일대일 대결이 기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활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인 '총'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총기 도입의 배경과 그 파급 효과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총은 언제, 어디서 들어왔을까?

총의 도입은 1543년, 화승총이 종자도(種子島)에 전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일본의 전쟁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당시 한 포르투갈 상인이 중국 선박에 올라타 동중국해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역은 폭풍이 잦은 곳이라, 중국 선박이 파도에 휩쓸려 사쓰마 국(薩摩国)에 속한 종자도 해안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종자도 사람들은 중국선에서 내린 포르투갈인들을 보고 놀랐지만, 중국인과의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통역 역할을 하는 중국인을 통해 사정을 듣기로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포르투갈인들은 상인이었고, 그들은 보지 못한 무기, 즉 '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무기는 화살이 닿지 않는 곳까지 명중시켜 목표물을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종자도의 영주 타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는 은 2천 냥이라는 거금, 지금 가치로 약 2억 엔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을 들여 두 자루의 총을 구입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이 최초로 총을 손에 넣은 순간이라고 전해집니다.

총의 국산화

총을 구입했지만,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두 자루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타네가시마 토키타카는 현지의 칼 장인에게 구입한 총의 제작을 의뢰합니다.

장인 입장에서는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무기를 만들라는 영주의 요청이었지만, 제조 강국이었던 일본답게 고민 끝에 단 1년 만에 총의 국산화에 성공합니다.

'총 = 타네가시마'라고 불릴 만큼,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그 땅의 이름을 따서 총을 '타네가시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네고로지(根来寺)를 통한 대량생산으로…

총 국산화 소식은 눈 깜짝할 새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고, 상인들도 이 새로운 무기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기슈(紀州)의 네고로지는 타네가시마 토키타카와 협상하여 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네고로지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진 사찰로, 당시 승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기승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총 전문 부대라 하면 게임 등에서도 유명한 '사이카 잇키(雑賀衆)'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네고로지에 속한 무장 집단 중 하나로 네고로지의 총을 사용했습니다.

이 네고로지 역시 타네가시마 토키타카처럼 칼 장인에게 총 제작을 의뢰했고, 어렵지 않게 제작에 성공합니다. 총이 도입된 지 3년 후에는 사카이(堺)로부터 생산 주문을 받는 등, 네고로지는 총의 주요 생산지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또한 오미(近江) 지방의 대장장이들도 총 생산에 뛰어들었으며, 특히 구니토모(国友)는 오다 씨의 철포 부대를 뒷받침하는 주요 생산 기지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전쟁을 바꾼 총기 도입의 영향

그때까지 일본의 전쟁은 창과 검으로 상대를 직접 쓰러뜨리는 백병전이 중심이었고, 원거리 무기라 해봐야 활이나 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총이 도입되면서 전투는 총을 활용한 방식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기존의 백병전은 총 앞에서 쉽게 제압당하기 때문에, 적군과 아군이 더 이상 전장에서 직접 맞붙어 싸우지 않게 됩니다. 또한 총의 공격력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성을 공격하거나 교전할 때 총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진군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전투는 점점 길어졌습니다.

이런 장기전에서는 막대한 재정과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가 필수였고, 농번기에 병사들이 농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병농분리(兵農分離)도 필요해졌습니다. 그 결과 오다 씨처럼 여건이 좋은 다이묘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구식과 신식 전투 방식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예가 바로 1575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VS 다케다 가문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입니다.

총이 주역으로 알려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군은 3천 정의 총 부대를 앞세워 다케다 가문 최강의 기마 부대를 유인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선보였는데, 이는 일본 전쟁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최강의 공격력을 지녔지만 약점도 있었던 총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며 전투의 방식 자체를 바꾼 총이었지만, 의외의 약점도 존재했습니다.

가격이 비싸 도입이 쉽지 않았다

1543년 총이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알 수 있듯이, 총은 매우 고급스럽고 비싼 물건이었으며, 한 자루에 지금 가치로 약 75만~250만 엔에 달했습니다. 가장 저렴한 75만 엔으로 계산해도 3천 정을 확보하려면 22억 엔이 넘는 비용이 듭니다.

게다가 총은 화약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화약의 원료인 초석(硝石)을 전혀 구할 수 없어 남만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한 발을 쏘는 데 필요한 화약 값은 3만 엔에 달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평범한 병사들이 총을 쏘는 일은 없었고, 총 훈련을 받은 병사만이 총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발사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본에 전해진 총은 '화승총(火縄銃)'이라 불리며, 화승에 붙인 불씨로 화약을 점화하고, 그 폭발력으로 탄환을 쏘는 방식이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 발사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1. 먼저 총신에 화약을 넣는다
  2. 탄환을 밀어 넣고, 이때 막대기로 눌러 다진다
  3. 화개(火蓋)를 열고 점화용 화약을 넣는다
  4. 조준하여 겨누고 발사한다

이 과정을 모두 마쳐야 비로소 한 발을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련의 작업에는 약 1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만약 준비가 끝나기 전에 기병이 공격해 온다면, 총 부대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또한 불을 다루는 무기이다 보니 비 오는 날에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단 사격(三段撃ち)을 도입하고 말방책(馬防柵)을 설치하는 등 매일 연구를 거듭하면서 총의 약점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