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아버지와 아들의 최후 대결, 사이토 도산 vs 요시타츠의 나가라가와 전투

전국시대는 가족조차 서로 적이 될 수 있었던 냉혹한 시대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가 검을 마주 보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지요.

NHK 대하드라마 『기린이 온다』에서도 그려질 것으로 보이는 나가라가와 전투는 바로 사이토 도산과 요시타츠, 부자(父子)가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사이토 도산의 인생 마지막 전투로도 유명한데, 이때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가 구원군으로 달려갔으나 늦었고, 도산으로부터 미노국을 물려받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는 일화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나가라가와 전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나가라가와 전투란?

나가라가와 전투는 1556년(홍치 2년) 4월, 미노국 나가라 강변에서 벌어진 사이토씨 부자 간의 내분 전투입니다.

전투의 결과, 장남 요시타츠가 승리했고 아버지 사이토 도산은 목숨을 잃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나가라가와 전투의 배경

1542년경 사이토 도산은 미노의 수호였던 도키 씨를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미노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다 1554년 가문을 요시타츠에게 넘기고 은거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의견이 맞지 않았고 점차 갈등이 깊어져 갔습니다.

도산과 요시타츠의 갈등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꼽힙니다.

부자 사이의 불화

도산은 가독을 요시타츠에게 물려주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NHK 대하드라마 『기린이 온다』에서도 요시타츠가 아버지 도산에 대한 불만을 미츠히데에게 털어놓는 장면이 묘사되곤 했습니다.

점차 도산은 요시타츠의 동생들인 시로와 키헤이지를 예뻐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요시타츠의 생모 미요시노는 원래 수호 도키 요리나리의 첩이었는데, 도키 요리나리 곁에서 이미 임신한 상태로 도산에게 시집와 곧바로 요시타츠를 낳았습니다. 그렇기에 '요시타츠는 과연 전 남편 도키 요리나리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산은 혈통이 확실한 어린 아들들, 즉 시로와 키헤이지에게 가문을 계승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은거는 도산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

사실 도산의 은거 자체가 요시타츠 파 가신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도산은 명목상으로는 가문을 물려주었지만 실권까지 내주고 싶지 않았고, 요시타츠의 처사에 불쾌함을 느껴 거래가 어긋났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산은 서서히 요시타츠를 배제하고 어린 아들들을 후계자로 세운 뒤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혈통이 무엇보다 중요시되던 이 시대에, 친자식이 아닐지 모르는 요시타츠보다 확실히 자신의 피를 이은 어린 아들들을 후계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나가라가와 전투의 경과

요시타츠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물론 동생들마저 배제하려는 도산을 위협으로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생들의 암살

먼저 요시타츠는 병문안이라는 명목으로 찾아온 시로와 키헤이지를 술자리로 유인한 뒤, 심복 가신에게 살해하게 했습니다. 숙부인 나가이 미치토시도 이 사건에 가담했기에, 시로 등은 믿을 만한 친척이 있다고 안심하고 방문했다가 화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살해 사건으로 위기를 실감한 도산은 성에 불을 질러 태운 뒤 나가라 강변으로 물러났습니다. 여기서부터 나가라가와 전투로 이어지지만, 도산 진영의 상황은 압도적으로 불리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구원

사이토 가문 내에는 도산에게 불만을 품은 이가 많아 끌어들일 수 있는 가신이 많지 않았고, 미노 삼인중 역시 요시타츠 편에 섰다고 전해집니다. 그 결과 전세는 요시타츠군 17,500명 대 도산군 2,700명, 도산에게는 압도적인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도산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으니, 바로 사위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도산은 즉시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오와리에서 군세를 이끌고 출진합니다. 그러나 오다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사이토 도산의 최후

나가라 강변에서 맞붙은 두 진영, 개전 초기에는 오히려 도산군이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 앞에서 도산군은 수적으로 밀리는 요시타츠군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삼면으로 돌격해 들어간 나가이 미치카츠는 도산을 산 채로 포획하려 했지만, 그 무공에 조급해진 다른 가신들이 도산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한편 미치카츠는 이에 격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처음부터 도산을 죽일 생각이 없이 산 포로로 잡으려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퇴각

구원군을 파견했던 오다 노부나가였지만, 도착을 기다리지 못한 채 사이토 도산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요시타츠군의 승리로 사기가 정점에 달한 적군은 오다군에게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노부나가 입장에서는 도우려던 상대가 이미 패한 이상 싸울 명분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후진(殿軍)을 세워 오와리로 철수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노부나가가 스스로 후진을 맡아 퇴각을 지휘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주장이 직접 후위를 담당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로, 도산의 죽음이 노부나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이토 도산의 유언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도산은 사위 노부나가에게 유언장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중에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아들 요시타츠보다 전술에 뛰어난 자', 즉 미노를 노부나가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도산은 요시타츠와의 대결에서 패배할 운명을 어렴풋이 예감했던 듯하며, 한편으로는 노부나가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모양입니다.

요시타츠 측 가신들 역시 수완가임을 자부하며 어린 아드님들을 아끼던 도산을 깊이 경계했을지 모릅니다. 한편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도산의 막내아들 사이토 토시하루는 오다 씨를 의지해 오와리로 피신하여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의 사이토 가문

아버지 도산을 쓰러뜨린 요시타츠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는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아들 타츠오키가 가독을 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미노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사이토 가문은 3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요시타츠의 친부가 전 수호 도키 요리나리라는 설을 바탕으로 설명했지만, 그 근거가 되는 자료는 에도 시대에 편찬된 미노 제가계보(美濃諸家系譜)이기에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전쟁이 요시타츠의 중신들이 도산 본인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싸움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