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아시카가 요시마사 – 금각사를 동경한 장군, 오닌의 난의 도화선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바로 '긴카쿠지(金閣寺, 금각사)'입니다. 그리고 그 금각사를 동경하여 지어진 것이 '긴카쿠지(銀閣寺, 은각사)'죠.

이번 글에서는 '은각사'를 지은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오닌의 난'이라는 대혼란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 한눈에 보는 프로필

1436년, 무로마치 막부 제6대 쇼군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암살당하면서 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제7대 쇼군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형마저 10세 때 추락 사고로 요절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요시마사가 8세에 제8대 쇼군으로 임명되었지만, 어린 그가 무슨 일인지 알 리 만무했습니다.

요시마사는 처음에는 할아버지인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처럼 정치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막부의 전성기를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다이묘들과 모친, 그리고 처가인 히노 가문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그는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또한 강한 성격의 아내에게 눌려 위축되기까지 했습니다.

25세 무렵, 일본 전역에 '간쇼 대기근(寛正の大飢饉)'이 닥칩니다. 교토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시마사는 연회에 빠져 있었고, 이런 시국에 자신의 저택을 개축하는 등 나라 걱정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습니다. 천황이 분노해도 듣지 않았으니, 정말로 의욕을 잃었던 모양입니다.

28세 무렵, 문득 은거를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이른 은거였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었기에, 승려로 있던 동생을 불러들여 차기 쇼군으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1년 뒤, 간절히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고, 아내는 친아들을 차기 쇼군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아시카가 막부의 후계 문제는 결국 불씨가 되어, 유명한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년)'이 일어나고 맙니다.

오닌의 난은 일본 최대급 세력들이 서로 격돌한 전쟁으로, 동군과 서군이 10년 동안 싸움을 벌였습니다. 전장이 된 교토는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닌의 난 중에 요시마사는 아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거합니다. 이후로는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죠.

47세 무렵, 제3대 쇼군 요시미츠가 지은 '금각사'를 본뜬 '은각사' 축조를 시작합니다.

54세 무렵, 아들이자 제9대 쇼군이 요절하자 다시 정치 무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실패합니다. 결국 10대 쇼군을 지명한 뒤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55세에 은각사의 준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금각사를 동경해 만든 은각사!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할아버지인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큰 동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쇼군으로서 큰 업적을 이룬 요시미츠처럼 되고자, 금각사를 본떠 은각사를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정치의 세계에서 벗어나 남은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기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처음의 요시마사 역시 정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견제를 받으며 점점 밀려나더니, 제9대 쇼군이 죽자 다시 정치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의욕의 불씨는 끄지 않았던 셈입니다.

요시마사에 대해 "쇼군으로서 이렇게 주변에 눌려 산 사람은 없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의욕이 있어도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더 억울한 일은 없겠죠.

참고로 '은각사'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에 '금각사'와 대비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죠.

즉, 재정난 때문에 은박(銀箔)을 입히지 못했다는 설도 있지만, 원래부터 입힐 계획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무리

요시마사는 흔히 '무능한 쇼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하고 싶은 일이 주변에 눌린 채 권위만 세워진 '불쌍한 쇼군'이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의욕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간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문화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육성한 '히가시야마 문화'는 오늘날 일본 전통 문화의 토대가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