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에 벼농사가 전래되면서 사람들이 쌀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상식입니다. 그 이전에는 채집과 수렵으로 식량을 확보했지만, 사냥에 실패하면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저장이 가능한 쌀 생산이 시작되면서 굶주림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야요이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살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조금 다릅니다.
쌀이 곧바로 주식이 된 것은 아니다?
저장 구덩이에서 발견되는 도토리 같은 견과류 유물과 이삭 모양 토기 등을 연구한 결과, 벼농사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수확량이 많지 않았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일본에서는 식량난이 크지 않았고, 식량 저장고와 패총(조개더미)을 볼 때 억지로 쌀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쌀이 맛있고 저장하기 편리하긴 하지만, 번거롭게 농사를 지을 만큼 필수적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죠.
이 가설이 맞다면, 벼농사가 전래되자마자 쌀이 주식이 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긴 세월 속에서 서서히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벼농사만 전해온 것이 아닌, 대륙에서 온 이주민
벼농사의 전파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한반도~규슈 루트가 가장 유력한 학설로 꼽힙니다. 그렇다면 왜 이주민들은 일본 열도로 건너왔을까요?
대륙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피신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일본 열도에 도달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원래 일본 열도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흥미롭게도 이주민과 토착민이 충돌했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륙에서 온 이주민들을 받아들였던 것이죠.
이주민들이 벼농사를 알려줬기 때문에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받아들였기 때문에 벼농사를 알려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벼농사 문화는 야요이 시대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주민들은 벼농사 외에 청동기도 전했습니다. 청동기는 벼농사 못지않게 일본 열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종래의 목제 농기구를 견고한 것으로 진화시켰다
- 귀중품으로 사용되어 신분 격차를 넓혔다
특히 신분 격차의 확대는 훗날 일본이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신분 차별'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여겨지지만, 이 시대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걸음이었던 셈입니다.
'나라'의 시작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사람들은 서로 협력해야 했습니다. 논을 일구고,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하고, 벼를 수확하고, 창고를 짓는 등 해야 할 일이 늘어나면서 상당한 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야요이 시대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어 집단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취락이 커지자, 취락을 정비할 지도자가 필요해졌고, 그 과정에서 청동기가 활용됩니다.
당시 지도자의 조건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어떻게 치렀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정치(政治)와 제사(祭祀)라는 개념이 이런 제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풍양 기원의 제사는 민심을 얻기 위한 정치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청동기는 제사 때 의기(儀器)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귀한 청동기를 사용함으로써 제사의 주술적 분위기를 한층 강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을 간의 분쟁
야요이 시대 사람들이 함께 벼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전국시대에 버금갈 정도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마을을 해자(濠)로 두른 환호 취락(環壕集落)이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
마을을 해자로 둘러싼 것은 각 취락에 강한 영역 의식이 생겼음을 보여줍니다. 낯선 사람이 자기 마을에 접근하면 분쟁이 일어났던 것이죠.
분쟁의 원인은 주로 용수 확보와 토지 문제였습니다. 시대가 진전되면서 전국시대처럼 영토 쟁탈전 같은 분쟁도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마을은 더욱 커지며 지배권을 넓혀갔습니다. 승자들은 벼농사에 적합한 토지와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더욱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소란스러웠던 야요이 시대 후반에는 사람들이 언덕이나 산 위에 정착하는 고지성 취락(高地性集落)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전국시대에 산성(山城)이 축조된 것과 같은 원리로, 다른 취락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력이 높은 취락을 형성한 것입니다.
야요이 시대 후반까지 번영한 마을 중 하나가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吉野ヶ里遺跡)입니다.
이처럼 마을 간의 분쟁을 거치며 강한 마을들이 거대해지고, 작은 마을에서 '나라'로 변모해 갔습니다.
대륙과의 교류 장악
거대해진 취락과 나라급 취락은 점차 대륙과의 관계 강화에 나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륙의 최신 기술을 독점하고 다른 취락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륙과 가까운 후쿠오카현과 사가현 북부의 취락들은 대륙과의 교역을 독점했다고 전해지며, 그중에는 큰 나라로 성장한 곳도 있었습니다.
한편 대륙 쪽 한(漢)나라 역시 공물(朝貢)이 늘어나는 것을 반겼고, 일본에게 최신 기술을 전수하며 상호 이익이 일치했습니다. 공물이란 '정기적으로 한나라에 찾아가 예물을 바치며 교류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한나라 입장에서 일본은 조공국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200년경 대륙은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에 들어서고, 일본은 위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훗날 히미코(卑弥呼)는 위나라로부터 금인(金印)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