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들이 무사를 고용해 곁에 두었지만, 시대 말기에 이르러 다이라노 기요모리처럼 실력을 갖춘 무사들이 등장하면서 중앙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무사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활발해졌고, 1180년에는 겐지(미나모토씨)와 헤이시(다이라씨) 사이에 겐페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를 열며 무사 정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었던 만큼, 무사들(고케닌)을 하나로 묶기 위한 여러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막부의 중심 세력인 집권 호조씨가 무사(고케닌)를 위한 법, 즉 고세이바이 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만들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에도 막부에까지 영향을 준 이 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란? 제정 배경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후의 선례와 무사 사회의 관습·실정을 정리한 것으로, 1232년에 제정된 일본 최초의 무사 법전입니다.

이 법은 제3대 집권 호조 야스토키를 중심으로 제정되어, 전국의 수호를 통해 각지의 고케닌에게 공포되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처음 성립했을 때, 막부는 동일본을, 조정은 서일본을 지배하며 약 30년간 동서로 나뉘어 통치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완전히 바꾼 것이 조큐의 난(承久の乱)입니다. 조정의 고토바 상황(태상천황)이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위해 거병했지만, 제2대 집권 호조 요시토키가 이끄는 막부군에게 패배하여 오키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조큐의 난에서 승리한 가마쿠라 막부는 지배력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조정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막부가 전국적으로 지배력을 넓혔음에도, 무사 사회에는 성립 이래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조큐의 난 이후, 고케닌과 장원·공령 지배 아래 놓인 주민들 사이에서 법적 분쟁이 빈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 생활 방식이 다르듯, 가마쿠라 시대에는 지역마다 관습과 언어, 윤리관이 달랐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떤 지역에서는 유죄가 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무죄가 되는 모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지배 지역에서 불의가 만연하고 주민들의 반란으로 이어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바로 이러한 통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의 내용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총 5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후 시대의 필요에 따라 '추가식목'이라 불리는 보충 법령이 덧붙여졌습니다.

법령은 주로 막부 지배 하의 고케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 제정 목적: 고케닌과 장원 영주(본소) 사이의 분쟁에 대한 공정한 재판 기준을 제시하는 것
  • 법의 적용 범위: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어디까지나 무사를 위한 법으로, 호조 야스토키 본인도 공가법(귀족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막부의 지배력이 강화됨에 따라 적용 범위도 점차 넓어졌습니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수호의 권한 규정: 대번 삼개조(大番三箇条)를 통해 교토 대번역(경비 임무)의 독촉, 반역·살인 등 범죄 단속 권한을 규정하고, 지두의 권한으로는 연공 징수를 규정
  2. 수호와 지두가 부정 행위를 저지르면 직위를 해임하고 처벌하기로 함
  3. 고케닌 영지 내에서 발생한 재판에는 막부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규정
  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호조 마사코가 하사한 영지는 어떤 소송이 제기되더라도 몰수하지 않기로 함
  5. 20년 이상 실효 지배한 토지는 문서상 소유자가 다르더라도 반환 의무가 없음

하나씩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호의 권한을 정한 것을 '대번 삼개조'라 하며, 그 외의 권한 남용 행위는 금지되었습니다.
  2. 수호가 허락 없이 타인의 영지를 몰수하거나, 지두가 징수한 연공을 납부하지 않으면 처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3.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막부가 고케닌을 위해 정한 법이므로, 고케닌 영지 내에서 발생하는 사적인 분쟁에는 막부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규정했습니다.
  4. 4번과 5번은 재판의 기본 전제로 설정된 것으로, 토지 소유의 실정에 맞게 법을 조정한 것입니다.

토지 분쟁에 공소 시효를 인정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사받은 땅이라도 그 자식이 주군에 대해 배신을 하면 빼앗을 수 있는 회반권(悔返権)은 무사 사회 고유의 제도였기 때문에 인정되었습니다.

아울러 수호와 지두의 직무 내용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호는 각 국(國)마다 한 명씩 배치되어, '대범삼개조'라 불리는 교토 대번역(경비) 독촉과 반역자·살인범의 검거를 주요 임무로 했습니다. 지두는 각 장원이나 영지에 배치되어 연공 징수와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추가식목'이라 불리는 보충 법령이 발포되어 본문에 덧붙여졌습니다.

고세이바이 시키모쿠가 이후 무사 정권에 끼친 영향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는 일본 법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법의 적용 대상은 무사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세력이 강해질수록 적용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 공정성은 시대를 초월해 계승되었으며,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에도 무로마치 막부의 창시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를 계승했습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는 무로마치 시대의 법령을 '겐무 이래의 추가(建武以来追加)'라는 이름으로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에 덧붙였습니다.

필요에 의해 급하게 만들어진 듯한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지만, 조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통용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로마치 시대 후반에는 센고쿠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에서 제정한 분국법(分国法)이 등장했습니다. 이 역시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법입니다.

에도 시대에는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가 제정되었습니다. 무가제법도는 에도 막부가 다이묘를 통제한다는 의미가 강해, 무사 전체를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성격이 조금 다른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무가(武家)의 기본 이념 자체는 고세이바이 시키모쿠와 그 추가 법령에 의해 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