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일본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페리의 내항입니다.
페리가 온 뒤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졌고,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이른바 막말(幕末) 시대가 시작됩니다.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
그때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대외 정책은 기본적으로 쇄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조선·네덜란드와의 교역이 일부 열려 있었고 사절단도 오갔습니다.
따라서 막부는 세계 정세를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었으며,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영국 등 서구 열강에 의해 인도와 중국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에 대한 정보를 접했습니다.
게다가 막부를 움직이던 인물들은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 페리가 미국에서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페리가 오기 50년 넘게 전부터 여러 이유로 외국 선박들이 일본 근해에 찾아왔습니다. 1792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락스만이 네무로에 도래했고, 1804년에는 레자노프가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를 방문했으나 막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1837년에는 일본 표류민을 태운 미국 선박을 일본 측이 포격으로 쫓아낸 '모리슨 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825년, 막부는 나가사키 이외의 곳에 접근하는 외국 선박은 포격으로 쫓아내라는 이국선 타퇴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 뒤로는 연료와 식량이 부족한 외국 선박에 편의를 제공하는 방침으로 태도를 바꿉니다.
하지만 쇄국 정책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1844년 네덜란드 국왕이 막부에 세계 정세를 설명하며 쇄국 중단을 권고했지만, 막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53년 페리가 내항하게 됩니다.
페리의 개국 요구
페리(미국)의 목적은 일본의 개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북태평양에서 포경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고, 일본을 포경선의 보급 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또한 증기선으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직접 항해할 때 일본을 중계 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간다고 하면 태평양을 곧장 건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당시 증기선은 태평양 횡단에 필요한 석탄을 충분히 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페리 함대는 동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항로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하는 데 반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반년을 들여 온 만큼, 막부가 쇄국 중이라며 거절해도 철수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전에 일본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진행했습니다.
나가사키 데지마에 가서 개국을 요청해도 에도의 회신을 기다리다 결국 거절당한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조사 끝에 "일본인은 예의 바르지만 권위에는 약하므로 위협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도착 장소도 나가사키가 아닌 에도 만 입구인 우라가로 정하고, 함포로 위협하며 등장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막부는 네덜란드의 정보로 페리의 내항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함대를 본 관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온 것이 배 한 척이 아니라 4척의 함대였고, 그중 두 척은 본 적 없는 증기선이자 당시 세계 최대급이었습니다.
두 배는 목조였지만 선체가 철판으로 덮여 마치 철선이 떠 있는 듯했고, 나머지 두 배도 방부 처리를 위해 검게 칠해져 있어 일본인들은 이를 흑선(구로후네)이라 불렀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흑선의 포격 위협 앞에서, 페리는 우라가에 상륙해 개국을 요구하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막부에 전달했습니다.
막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다음 해에 답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일 화친 조약(가나가와 조약) 체결
페리는 일본을 떠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하이에서 반년을 기다린 뒤 합류한 3척을 포함한 7척의 대함대로 다시 일본에 상륙합니다.
이에 놀란 막부는 마침내 개국을 결정합니다.
그때 요코하마에 상륙한 페리와 맺은 것이 미일 화친 조약(가나가와 조약)입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모다·하코다테 두 항구의 개항
- 영사관 설치
- 미국에 최혜국 대우 부여*
* 가장 좋은 대우를 받은 국가와 동일한 대우를 체결국에 부여하는 것
미일 간의 소식은 이윽고 다른 나라에도 알려졌고, 같은 해 영국 함대와 러시아 군함도 나가사키를 방문했습니다. 더 이상 쇄국을 명분으로 거절할 수 없게 된 막부는 영국·러시아·네덜란드와도 비슷한 조약을 맺습니다.
다만 가나가와 조약은 일본이 개국을 결정한 것일 뿐 통상(무역)에 관한 규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조약에 따라 부임한 주재 영사 해리스가 막부와 통상 조약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은 일본에 관세 자주권이 없고, 미국의 영사 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잇달아 체결합니다.
막부 권위의 실추와 존왕양이론
이러한 일련의 대응 과정에서, 그때까지 전제 정치를 해오던 막부는 자신감을 잃고 경위를 조정(천황의 궁정)에 보고하고, 조약 체결의 허가를 구하며, 여러 다이묘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우유부단한 대응 때문에 막부의 권위는 떨어지고, 반대로 조정의 권위는 급격히 높아집니다.
막부의 대외 정책에 대해 "막부가 약하다면 조정을 내세워 이국인을 몰아내자"는 여론, 즉 존왕양이론이 퍼져 나갑니다.
막부 편에 서더라도 강대한 군사력을 지닌 서구 열강을 거부하기 어려웠고, 거부했다가는 포격을 받아 에도의 시가지가 파괴될 판국이었습니다.
그렇게 강대했던 중국마저 서구의 영국에게 아편전쟁에서 패배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이이 나오스케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약을 거부하고 전쟁을 벌이다 지면 패배하여 배상금을 물고 굴욕을 당한다. 그러므로 피해가 적은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중국처럼 식민지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결정은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 시대는 논쟁으로 치닫습니다.
개국 이후 정치를 담당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세계 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 수립이 목표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 존왕양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