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기사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연표와 함께 사용해 주세요. 앞으로는 링크 수를 늘릴 예정입니다.
전국시대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다양한 분쟁은 관동구보(關藤九堂)와 관동지방을 연루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대기는 교토쿠의 변을 기준으로 한다. 원래 오닌의 난은 전국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벤트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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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 | 관동에서 교토쿠 란 발생 | 무로마치 시대에 일어난 28년간의 간헐적인 내전. 관동 막부의 비서인 구보 고가 씨와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보좌관(=관동 지역)을 암살한 사건. 무로마치 막부 외에 가마쿠라 고가의 보좌관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그리고 동맹 관계 오기야 우에스기 가문)도 아시카가 시게우지 씨와 싸웠다. 전국시대 초기의 관동지방의 혼란은 대부분 관동구보(關藤九府)와 관동지방의 전투였다. |
1467 | 오닌 전쟁 |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서군의 야마나 소젠의 내전 ⇒ 전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 |
1485 | 야마시로 쿠니이치 잇키 | 야마시로 국(교토부 남부)에서는 수호 다이묘 하타케야마의 정치적 영향력이 제거되고 국민과 농민이 협력하여 8년 동안 자치를 실시했습니다. |
1487 | 관동에서 장수의 란 발생합니다 | 오기야 우에스기 가문의 세력으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우에스기 아키사다(칸토 칸레이)와 오기야 우에스기 가문 우에스기 사다마사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
1488 | 가가의 잇코잇키 | 가가에서 혼간지 승려들이 일으킨 반란. 거의 100년 동안 지속됩니다. |
1493 | 이즈 란 발생합니다 | 구보 호리코시(무로마치 막부의 간토 통치 기구 비서)는 가문의 통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
1495 | 이즈 난기류가 가라앉습니다 | 고호조의 조상인 호조 소운이 이즈에 정착합니다 |
미노에서 후나다 전투 발생 | 미노 수호자 따오기의 후계자 대결 오미와 에치젠이 얽힌 싸움, 그리고 최후였다. | |
1505 | 장수의 격동이 가라앉는다 | 사다마사의 죽음과 더불어 오기야 우에스기 가문은 두 명의 가신의 죽음과 후계 다툼으로 인해 항복했다. 나중에 두 가족 사이에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야마우치-오기야 동맹이 돌아왔습니다. ⇒ 구다구다의 결과로 우에스기 가문은 호조 씨에게 간토 지방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
1516 | 호조 소운이 사가미에 정착 | 시모가미 의 개척자. |
1517 | 아키 지방에서 아리타 나카이데 전투 발생합니다 | 당시 주고쿠 지역의 챔피언은 오우치 요시오키 였습니다. .. 전 오우치 씨의 부하였던 아키의 수호자 다케다 모토시게 그러나 아마고 이즈모(아키 국에서 세력을 키우려는 세력)의 도움으로 오우치 씨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침략이 시작되었다. 오우치 씨는 요시카와 아키 씨와 모리 씨를 다케다 씨에게 맡겼습니다. 모토나리 모토나리의 첫 번째 팀. |
1521 |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쇼군이 됨 | 12대 쇼군 관련 기사:쇼군과 함께 무로마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다 |
1523 | 닝보 사건 (네이하 / 닌포란) | 오우치 씨와 호소카와 씨의 일명 무역(당시에는 일명 무역)의 이익을 둘러싼 갈등 .. 오우치 씨는 정식 칸헤를 가지고 있고, 호소카와 씨는 무효 칸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소카와 씨는 현지에서 뇌물을 주고 공동 거래를 하다가 갈등을 빚게 됐다. ⇒ 그 후 명나라 무역은 오우치 씨가 독점합니다 |
모리 모토나리가 가문의 계승자 | 원래 아키 국(히로시마 현 서부)의 국주였습니다. | |
1536 |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가문의 계승자 | 스루가와 토토미의 수호 다이묘(시즈오카 현 주변) |
천상의 문법 하나노란 | 엔랴쿠지 종파가 당시 교토에 퍼지던 니치렌종(법화종)을 라쿠추로 몰아낸 사건. 당시 성전은 상당한 위력을 지닌 큰 세력이었습니다. 다이묘마저도 교단 간의 갈등에 머리를 찔러 교토의 상당 지역에 피해를 입혔다. | |
1541 | 다케다 신겐이 가문의 계승자 | |
1542 | 사이토 도산이 미노를 붙잡는다 | 게코쿠조 다이묘로 유명함 |
1543 | 총 소개 | 1542년 이론도 있습니다. 유럽에서 다네가시마에 소개되었습니다 |
1546 | 가와고에 전투 | 호조 소운의 자식인 호조 우지츠는 무사시 국의 본성(도쿄, 사이타마, 가나가와 일부)에 있는 우에스기 오기야의 당주가 거주하는 성을 떨어뜨렸습니다. |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쇼군이 됨 | 제13대 쇼군.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부활시키고 다양한 다이묘와 함께 발전시키려는 노력. 관련 기사:쇼군과 함께 무로마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다 | |
1548 | 우에다하라 전투 | 시나노의 다케다 신겐(당시, 알기 쉽게 신겐으로 통일)은 기타시나노의 전국주인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싸워 대패한다. |
1549 | 가고시마의 자비에르 | |
1551 | 오다 노부나가가 가문의 계승자 | 관련 기사:오다 노부나가는 왜 거주지를 옮겼습니까? |
1552 |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에치고에서 탈출하다 | 코즈케의 다이묘는 호조, 다케다와의 전투 이후 잇따라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
1553 | 가와나카지마 전투 (55/57/61/64) |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 국의 나가오 케이토라 (나중에 그는 우에스기 가문의 뒤를 이어 켄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강> 키타 시나노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 |
1555 | 미야지마 전투 | 모리 모토나리는 아키 국(현재 히로시마 현 서부)에서 오우치 가문의 가신(그러나 지배력을 갖고 있던) 스에 하루카타와 싸워 패배시켰다. ⇒ 주고쿠 지방에서 오우치 씨의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됨 |
1556 | 나가라강 전투 | 사이토 도산과 그의 아들 사이토 타츠오키의 부자 대결. 동생을 사랑했기 때문에 버려질까 봐 두려웠던 류코는 도산을 물리쳤다. |
1560 | 오케하자마 전투 | 오다 노부나가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전투는 마지막에 벌어집니다. 노부나가가 승리한 후, 그는 일제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관련 기사:노부나가는 어떻게 요시모토를 이길 수 있었습니까?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와에서 독립하다 | 인질로 이마가와를 향하여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전했으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패한 후, 이마가와 군에 의해 버려진 오카자키 성에 들어가 군사를 시작했다. 운영. 독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세요 | |
초소카베 모토치카가 가문을 물려받음 | 토사 국의 센고쿠 다이묘 | |
1561 | 나가오 케이토라(켄신)가 관동 우에스기 씨의 후임 | |
1562 |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동맹 | =칭저우 동맹 |
1565 |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하다 | =에이로쿠노헨 |
1566 | 스미마타 이치야조 건설 | 노부나가가 미노를 침략했을 때 기노시타 도요시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1568 | 노부나가,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함께 도쿄 입성 | ⇒ 키나이에서 다이묘가 노부나가 공성 네트워크 개시 |
1570 | 아네가와 전투 | 아사쿠라 오우미(현 시가현)에서 노부나가의 조라쿠 요구를 거절한 그는 노부나가의 친척이면서도 아사쿠라 아사이 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 그리고 오다/도쿠가와군 [제1차 노부나가 공성 네트워크]로 전투 ⇒ 오다군과 도쿠가와군이 승리했지만, 오다 측의 피해도 컸다. |
이시야마 전투(~80년) | 셋쓰(현 오사카부)에서 정토신슈 혼간지 대 오다 노부나가의 전투 | |
1571 | 노부나가가 히에이산을 학살했습니다 |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가한 세력 중 한 명이 엔랴쿠지에서 패주한 아사이와 아사쿠라의 병사들을 엔랴쿠지로 끌어냈다. 게다가 교를 노릴 때에는 중요 거점 '홋코쿠 가도와 와카사 가도'를 통과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세력은 군사 기지로서 엔랴쿠지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1572 | 미카타가하라 전투 | 다케다 신겐 대 도쿠가와 / 토토미(현 시즈오카 현)에서 열린 오다 군 전투 ⇒ 이에야스 대패, 오다와 다케다가 결별 결정 |
1573 | 무로마치 막부 멸망 | 막부 멸망까지의 흐름:노부나가의 텐카후부는 당초... |
1575 | 나가시노 전투 | 미카와 국(현 아이치현 신시로시)에서 발생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대 다케다 가쓰요리의 전투 ⇒ 오다, 도쿠가와 군의 승리로 다케다 가쓰요리의 세력이 쇠퇴 |
1577 | 테도리가와 전투 | 가가국(현 이시카와현 남부)에서 우에스기군과 오다군과의 전투 ⇒ 우에스기군의 승리 |
1580 | 노부나가와 혼간지는 평화롭다 | 혼간지 측은 혼간지의 문지기인 고사가 오사카를 떠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혼간지는 노부나가 공성망의 중심 세력이었기 때문에 공성망은 붕괴될 예정이다 | 와 연결됨
1582 | 텐모쿠잔 전투 | 노부나가, 도쿠가와, 호조가 다케다 가쓰요리의 영토를 침공합니다 ⇒ 다케다 카이의 멸망 오다군의 승리로 인해 |
혼노지 사건 | 노부나가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 절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노부나가는 자살이다
⇒ 혼노지 절의 기이함. 아케치 미츠히데는 왜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는가? | |
야마자키 전투 | 혼노지 변경에 따라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군과 아케치군이 충돌한다 ⇒ 하시바군의 승리 미츠히데는 살해되거나 자살했다고 한다. | |
1583 | 시즈가타케 전투 |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는 오미 국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후계 전투와 관련하여 싸운다(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 히데요시는 히데요시, 셋째 아들 노부타카는 가쓰이에). ⇒ 승리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다 .. 세계로 다가가다 |
1584 | 고마키와 나가쿠테 전투 | 히데요시 주로 오와리(현 아이치현)에서 일어난 일과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 와의 배틀 (← 초소카베 모토치카, 기슈 네고로슈도 참가) ⇒ 전투 자체는 이에야스 진영의 승리였지만 이에야스의 대의인 노부오와 히데요시 사이에는 평화가 확립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사다리를 제거한 채 미카와(현 시즈오카)로 돌아온다. |
다테 마사무네가 가문의 계승자 | ||
1585 | 히데요시가 시코쿠에 정착하다 | 초소카베 모토치카는 도사 이치쿠니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히데요시를 가신으로 삼았습니다. |
히데요시가 간파쿠가 됨 | 동방으로의 진출을 일단 제쳐두고, 세계를 통일하는 발걸음은 확고해집니다. 그는 동양에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군이라는 칭호를 얻지 못했습니다. | |
1586 |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가신입니다 | 히데요시의 여동생은 이에야스의 단골방에 들어가 처남이 되었습니다. |
히데요시가 다이조다이진이 됨 | 천황으로부터 새로운 성을 부여받고 자신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칭합니다 | |
1587 | 히데요시가 규슈에 정착하다 | 시마즈 씨가 항복합니다. 사츠마, 오스미, 히나타 구호 td> |
1588 | 검 사냥 명령 | ⇒ 검 사냥 관련 기사 |
1589 | 다테 마사무네가 오슈에서 도약하다 | 도호쿠 남부 지역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려면 |
1590 |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 칸하를 통치하는 호조 가문은 강제로 항복하고 세계를 통일해야 합니다. |
1591 | 센노리큐 자살 | ⇒ 리큐 칠철과 다도 |
1592 | 분로쿠의 역할 | 첫 한국군 파견 ⇒ 한국 파병 이유 |
1597 | 한국 침략의 역할 | 두 번째 한국군 파견 |
1598 | 히데요시의 죽음 |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철수하십시오. 한국군은 결국 일본측에 패배하게 된다 |
1600 | 세키가하라 전투 | 이에야스 대 이시다 미쓰나리 히데요시 사후 주도권 싸움 후 대결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 |
1603 |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통일과 에도막부의 시작 |
1614 | 오사카 윈터팀 | 히데요시의 재정적 힘과 명성은 이에야스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도요토미를 멸망시킬 기회를 몰래 요청했습니다. 사찰의 큰 종에 적힌 문자는 오사카 공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의 성, 오사카 성의 생명선인 해자를 채우는 조건으로 와무. |
1615 | 오사카 여름팀 | 이에야스가 다시 어려운 공을 쳤고, 도요토미 측이 공을 박살냈습니다. ⇒ 히데요리와 요도(히데요시의 첩, 노부나가의 여동생 이치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는 자살한다. ⇒ 그 후 약 260년간 도쿠가와 막부 | 가 뒤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