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무로마치·전국시대에 빈번히 일어난 민중의 반란, 토치잇키와 국일기

전국시대의 역사에서 다이묘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토치잇키(土一揆)가 일어났고, 야마시로에서는 국인(國人)들에 의한 국일기(国一揆)도 발생했다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에 일어난 반란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자쿠(馬借)가 주도한 반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하극상(下剋上)의 움직임이 나타난 무사 사회와 마찬가지로, 농민과 상인을 중심으로 한 국인 계층의 자주성이 강화되면서 영주 계급에 대항하는 운동도 거세어졌습니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마자쿠(馬借) 집단은 오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나 구사쓰(草津) 같은 교통 요충지에서 일찍부터 결성되었습니다. 정보력과 단결력을 갖춘 마자쿠는 채무 소멸을 요구하는 덕정일기(徳政一揆)를 자주 일으켰습니다.

1426년에는 사카모토의 마자쿠가 집단을 이루어 교토에 난입해 쌀값 하락을 막으려 했으며, 1428년에는 사카모토 마자쿠의 봉기를 계기로 야마시로·야마토에서 기나이(畿内) 전역으로 정장(正長)의 토치잇키가 확산되었습니다.

토치잇키에 참여한 국인 다수는 막부에 덕정령(徳政令)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제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義持)의 사망, 이세에서 고카메야마 천황의 황자 오구라노미야(小倉宮)가 거병한 사건, 기상 이변으로 인한 흉작과 역병 등으로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덕정일기의 표적, 도소(土倉)

정장의 잇키 이후에도 5~10년 주기로 큰 폭동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봉기를 통해 막부로부터 덕정령을 받아낸 사례가 많았습니다. 덕정일기가 일어나면 최초의 공격 대상은 도소(土倉)였습니다. '도구라'라고도 불리는 도소는 현대로 치면 금융업과 전당포를 경영하는 존재였습니다.

도소는 무로마치 시대에 크게 발전했으며, 교토·나라·오미 사카모토 등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막부와 사원·신사에 돈을 납부하면서 연공 납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막부의 중요한 재정원이었습니다. 자본력이 큰 도소는 '주가(酒屋)'를 겸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권문(権門)에 대한 납입을 담당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상징으로 여겨져 공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15세기 토치잇키·국일기 연표

  • 1426년 … 오미 사카모토의 마자쿠가 교토에 난입
  • 1428년 … 정장(正長)의 토치잇키
  • 1429년 … 하리마의 토치잇키
  • 1432년 … 야마토 토치잇키
  • 1441년 … 가킷쓰(嘉吉)의 토치잇키
  • 1447년 … 야마시로 니시오카의 토치잇키
  • 1454년 … 야마시로 토치잇키, '교토쿠(享徳)의 덕정령'
  • 1457년 … 조로쿠(長禄)의 토치잇키
  • 1472년 … 오미 사카모토의 마자쿠 잇키
  • 1480년경부터 농민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
  • 1485년 … 야마시로 국일기(国一揆)
  • 1486년 … 교토의 덕정일기

야마시로 국일기가 이룩한 자치

기나이 지방에서는 응인의 난(応仁の乱) 이후에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義就)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政長)의 항쟁이 계속되었고, 미나미야마시로(南山城)가 주요 전장이 되었습니다. 야마시로·야마토·가와치의 무사와 국인들도 양군의 대립에 휘말려 피해를 입었고, 이에 항의하는 봉기가 교토와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85년, 혼란에 빠진 야마시로국을 스스로 관리하기 위해 15세부터 60세까지의 국인과 농민 대표 36명이 모여 하타케야마씨의 즉각적인 철퇴, 사원·신사 영지의 반환, 새로 설치된 세관(関所)의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야마시로 국일기입니다.

다음 해인 1486년, 야마시로의 백성들은 우지(宇治)의 평등원(平等院)에 모여 국중법(国中法)을 제정했습니다.

이후 잦은 회의를 통해 우지강 남쪽의 미나미야마시로를 소국(惣国)으로서 통치해 나갔습니다.

월행사(月行事)가 매달 돌아가며 정무를 맡았고, 살인 사건의 재판 등 원래 수호(守護)가 담당해야 할 역할까지 수행하며, 국인에 의한 자치 통치가 약 8년간 실현되었습니다.

야마시로 자치의 붕괴

농민과 국인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지만, 농민을 영주로서 지배하려는 국인과의 대립이 표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야마시로의 새로운 수호가 된 이세 사다쿠니(伊勢貞陸)가 각종 과세 명령을 내리는 등 권위 강화에 나서면서 국인 진영마저 분열되었고, 결국 자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국일기는 전례 없는 농민 투쟁으로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며, 그 자치는 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현된 파리 코뮌이라는 자치적 사회 실험보다도 앞선 것이었습니다.

야마시로 국일기 연표

  • 1485년 8월 … 교토·나라를 중심으로 토치잇키 발생
  • 같은 해 12월 … 야마시로의 국인들이 하타케야마 군의 철퇴를 요구
  • 1486년 2월 … 야마시로의 국인들이 평등원에 모여 국중법을 제정, 이후 8년간 자치 지속
  • 1493년 8월 … 야마시로 수호 이세 사다쿠니가 권위를 행사하자 국인 계층이 분열, 자치 붕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