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하극상의 선구자, 아사쿠라 다카카게와 오닌의 난

아사쿠라 씨(朝倉氏)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와 싸운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가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함께 싸워 노부나가를 후퇴시키기도 했지만, 이후 일조다니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패배한 무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11대 당주 요시카게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오닌의 난 당시, 7대 당주 다카카게는 서군을 대표하는 주력 무장으로서 크게 활약했으며, 그 위풍으로 '서국 제일의 용장'이라 불렸습니다.


오닌의 난과 아사쿠라 씨

아사쿠라 씨는 원래 다지마국의 재지 국인(国人)이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스이바 다카쓰네를 따라 에치젠으로 들어온 것이 에치젠 아사쿠라 씨의 시작이며, 이때의 당주가 바로 아사쿠라 히로카게였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에치젠의 슈고직은 대대로 스이바(斯波) 씨가 계승해 왔지만, 점차 슈고대인 가이(甲斐) 씨가 세력을 키우며 스이바 씨와 대립하게 됩니다. 1458년, 에치젠 슈고 스이바 요시토시와 슈고대 가이 쓰네지가 충돌한 조로쿠 합전에서 다카카게는 가이 씨 측에 서서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가이 쓰네지가 사망하자 아사쿠라 다카카게는 한층 더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스이바 씨의 가독 상속 분쟁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오닌의 난에서 다카카게는 스이바 요시카도와 함께 서군에 가담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에치젠 슈고직을 주겠으니 동군으로 돌아서라'는 조건을 내걸고 배반을 제안합니다. 다카카게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동군으로 넘어섰고, 오닌의 난은 동군의 우위 속에 종결되었습니다.


에치젠 슈고 취임과 에치젠 통일

1471년, 에치젠 슈고에 취임한 다카카게는 실효 지배를 통해 영국화(領国化)를 추진합니다.

초기에는 스이바 씨와 가이 씨의 저항으로 고전했지만, 연이은 승리를 거듭하며 에치젠국 거의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고, 마침내 스이바 씨를 대신해 에치젠 슈고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이름은 역사에 뚜렷이 남게 되었습니다.


분국법 제정의 선구자

다카카게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으며 학문과 무예 모두에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가독을 이은 후에도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으며,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법전이라 할 '아사쿠라 가법'을 1479년에 제정했습니다. 내용 또한 검약을 실천할 것, 중요 관직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등 매우 합리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분국법이란 전국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를 지배하기 위해 정립한 국정 운영 방침과 법령을 의미합니다. 다이묘 가문의 가내 질서를 규정하는 '가법'과 영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분국법'으로 나뉘며, 군사·형벌·민정에 이르는 각종 규칙이 담겨 있습니다.

다카카게가 제정한 것은 '가법'으로, 대대로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규칙과 가훈을 문자로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분국법이라 하면 흔히 이마가와 씨의 '이마가와 가나 목록'(1526년)이나 다케다 씨의 '고슈 법도 차제'(1547년)가 유명한데, 그보다 한참 앞선 초기 전국 시대에 이미 법전을 제정했다는 점에서 다카카게는 분국법의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호쿠리쿠의 소교토, 이치조다니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거점으로 삼은 이치조다니(一乗谷)는 다카카게 → 우지카게 → 사다카게 → 히사모리 → 요시카게 5대에 걸쳐 무려 103년간 에치젠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교토와 나라의 귀족·승려 등 문화인들이 잇달아 내려오면서 '호쿠리쿠의 소교토(小京都)'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당주 요시카게는 난요지(南陽寺)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맞아 벚꽃 감상 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573년, 노부나가에게 회유된 헤이센지 승병들의 방화로 성읍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노부나가의 지시를 받은 구신 마에바 요시쓰구가 이치조다니에 저택을 세우고 에치젠을 통치하게 됩니다.

1575년 잇키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에치젠을 하사했습니다. 가쓰이에는 수륙 교통이 편리한 기타노쇼(北ノ庄)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이치조다니는 점차 버려졌고, 결국 논밭 속으로 파묻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