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무로마치 막부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다툼, 응인의 난으로 가는 길

무로마치 시대 중기,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1449년부터 1473년까지 재직했습니다.

쇼군에 취임한 그는 할아버지 요시미츠와 아버지의 정책을 되살리려 하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정실 히노 도미코(日野富子)를 비롯해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야마나 소젠(山名宗全) 등 유력 슈고 다이묘들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서, 요시마사 주도의 정무 운영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기타야마 문화와 히가시야마 문화

요시마사 정치 초반에는 쇼군청(막부)의 재정이 요시미츠 시대만큼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실권을 빼앗긴 뒤에는 정무에 대한 관심이 옅어졌고, 축적해 온 부를 막부의 권위나 백성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취미인 건축과 정원에 탕진하면서 훗날 재정난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낭비가 어쩌면 문화적으로는 결실을 맺었는지도 모릅니다. 긴카쿠(銀閣)로 대표되는 와비사비(侘び寂び)의 미학, 이른바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가 바로 이 시기에 꽃피웠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소장했다는 명품 차입(茶入) 츠쿠모나스(九十九髪茄子) 역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입니다.

한편 긴카쿠(金閣)로 상징되는 제3대 쇼군 요시미츠의 화려한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와 대비되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번째 문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무가 히노 도미코에게 맡겨진 데다 요시마사의 낭비가 거듭되면서 막부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고, 막부의 구심력도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슈고 다이묘 가문들의 가독(家督) 다툼은 해가 갈수록 격해져 갔습니다.

가문의 내분은 막부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요시마사에게는 본래 후계자가 없었기에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를 환속시켜 차기 쇼군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정실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義尚)를 낳으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도미코는 요시히사를 차기 쇼군으로 세우기 위해 유력 슈고 다이묘 야마나 소젠과 손을 잡았고, 막부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문정의 변(文正の変)

1466년 9월 6일, 쇼군의 측근 이세 사다치카(伊勢貞親)는 간레이(管領) 자리를 둘러싼 시바씨의 내분에 개입한 데 이어, 쇼군 요시마사의 동생 요시미마저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야마나 소젠과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이 정변을 규탄하며 반격에 나섰고, 이세 사다치카는 교토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 이세 사다치카는 훗날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 북조조 소운)의 숙부에 해당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세 사다치카를 축출한 호소카와씨와 야마나씨는 이후 막부 최고 권력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요시마사의 정실 히노 도미코는 야마나 소젠 편에 섰고, 본래 차기 쇼군이었던 요시미는 호소카와 카츠모토 편에 섰습니다.

쇼군으로서 정치를 이끌고자 했던 요시마사였지만, 친아들의 출생과 정변으로 측근 세력이 와해되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응인의 난 결전 전야

쇼군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본래 요시마사와 그 측근들이 담당하던 막부 가문 통치의 중추는 야마나씨와 호소카와씨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도미코는 소젠에게, 요시미는 카츠모토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다른 유력 슈고 다이묘들도 양대 세력 중 한곳에 속해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의 슈고 다이묘 가문들 역시 가독 상속을 둘러싼 다툼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특히 시바(斯波)씨와 하타케야마(畠山)씨에서 벌어진 갈등은 야마나·호소카와 양씨의 대립과 얽히며 큰 소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슈고 하타케야마 모치쿠니(持国)는 조카 마사나가(政長)를 양자로 들였으나, 친아들 요시나리(義就)가 태어나자 마사나가를 폐하고 요시나리를 세우려 하며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시바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시바 요시카도(義廉)는 소젠이, 시바 요시토시(義敏)는 카츠모토가 지원하면서 막부는 완전히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상고료 신사(上御霊神社) 전투

1467년, 야마나 소젠은 쇼군 요시마사에게 접근해 간레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해임하고, 대신 야마나 파의 시바 요시카도를 새 간레이로 임명했습니다. 동시에 야마나 파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진입했으며, 소젠은 쿠데타까지 일으켜 쇼군의 어소에 들어섰습니다.

패배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는 교토 쇼코쿠지(相国寺) 북쪽에 있는 상고료 신사에서 대항 태세를 취했지만,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쇼군 요시마사의 뜻을 묵살하고 지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교토는 일시적으로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패배를 당한 호소카와 파는 야마나 소젠 타도를 위해 착실히 준비를 거듭했고, 곧 호소카와 파의 반격과 함께 응인의 난(応仁の乱)이 시작됩니다.

장자 단독 상속과 분할 상속 제도

가마쿠라 시대의 무가(武家)는 영토를 일족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할 상속이 원칙이었습니다. 장남이든 차남이든, 남자든 여자든 일족 형제자매가 화목하게 땅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상속 방식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대를 거듭할수록 자손들의 영지는 점점 작아져 모두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식 수가 많았기에, 자식들은 대개 부모보다 적은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를 보완한 것이 개간과 전쟁이었습니다. 주변에 미개간지가 있다면 땅을 넓힐 수 있었고, 가마쿠라 막부나 조정이 위기에 처하면 무사들은 즉시 달려가 구원하고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여기서 '고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 관계의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전쟁 비용은 무사들이 스스로 부담했지만, 전공을 세워 새로운 영지를 받으면 분할 상속으로 인한 영지 감소를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말기 몽골의 침입(원구)가 일어나면서 이 분할 상속 제도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한 원인이 됩니다.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몽골 침입을 계기로 단독 상속이 일반 가문에도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로마치 시대의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장자 단독 상속이 확립되었고, 장남이 영지를 홀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차남 이하의 자제들은 가신(家臣)이 되었고, 가신단의 구성이 변화하면서 종가(宗家)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성의 재산권은 부정되어 화장지(化粧料)라는 이름의 소량의 토지만 물려받게 되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결정적으로 하락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