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는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희세의 영웅으로 꼽힙니다. 놀랍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백만 석을 거느린다면 누가 가장 강한 무장일까? 가신들에게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꼽았지만, 히데요시 본인은 가모 우지사토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모 우지사토는 인생 한복판인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은 우지사토의 생애와 그가 펼친 경제 정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질에서 시작된 가모 우지사토의 인생
가모 우지사토의 아버지 가모 가타히데(蒲生賢秀)는 히노 성주로서, 오미 간온지 성의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신이었습니다. 우지사토는 1556년 가타히데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간온지 성의 롯카쿠씨를 공격해 격파하자, 가타히데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히노 성을 내주었습니다. 이때 우지사토는 노부나가의 인질로 보내졌고, 가모씨는 시바타 가츠이에의 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인질이 된 우지사토를 노부나가는 깊이 총애했고, 자신의 딸 후유히메(冬姫)와 결혼시켰습니다. 인질에게 딸을 시집보냈다니, 오다 가문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미노 삼걸의 하나인 이나바 잇테츠 역시 "장차 대군을 이끌 무장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노부나가와 잇테츠의 안목대로, 가모 우지사토는 신하로서도 영주로서도 문무 양면에서 활약하는 무장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평생 측실을 두지 않고 후유히메와 금슬의 부부로 지냈다고 하며, 두 사람 사이에는 남매 두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세 마쓰자카 12만 석 다이묘로
우지사토는 시바타 가츠이에의 휘하로 아사쿠라 공격에 참전해 활약했으며, 이후 아네가와 전투, 나가시마 공격, 오타니 성 공격, 나가시노 전투, 아리오카 성 공격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해 수많은 무공을 세웠습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가타히데와 함께 아즈치 성에 있던 노부나가 일족을 히노 성으로 피신시키며 아케치 미쓰히데에 맞서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후 기요수 회의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와 협력하기로 하고,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기타이세의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견제하며 히데요시의 천하 장악에 결정적인 힘을 보탰습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가 패색이 짙어지자 퇴각을 멋지게 엄호했고, 그 공으로 이세 마쓰가시마 성으로 전봉됩니다. 이어 1588년에는 마쓰자카 성을 거점 삼아 이세 마쓰자카 1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가모 우지사토의 오미 상인 육성
우지사토는 전장에서의 활약뿐 아니라 경제 감각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소년 시절 노부나가의 인질에서 사위가 된 우지사토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노부나가의 정책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히노 성 시절, 히노는 노부나가의 경제 정책을 본받으며 크게 번영했습니다.
자신의 영내에서 우지사토는 '상인 육성'에 특별히 힘을 기울였습니다.
히노, 다카시마, 오미하치만, 히코네 등 오미 지역에서 번성한 상인 집단을 '오미 상인'이라 부르는데, 그중 '히노 상인'은 바로 우지사토가 키워낸 상인들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명으로 이세로 옮겨간 우지사토는 지명을 '마쓰자카'로 바꾸고, 히노에서 상인들을 데려와 이세 현지 상인들과 잘 융합시켜 '마쓰자카 상인'을 탄생시켰습니다.
이후 이세 마쓰자카에서는 미쓰이, 하세가와, 오즈 같은 유명 상인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오즈 가문을 떠나 학문에 몰두한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활동할 수 있었던 기반 역시 가모 우지사토가 다진 토대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하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지사토를 도호쿠 지방의 아이즈 구로카와 성으로 전봉시킵니다.
아이즈 와카마쓰 91만 석 다이묘가 되다
이러한 처우에 우지사토는 저택 홀의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석고가 12만 석에서 91만 석으로 늘었으니 겉보기엔 대출세처럼 보이고, 가신 중 누군가 기뻐서 운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지사토는 "영지가 적더라도 도읍 가까이 있으면 천하를 노릴 기회가 있지만, 영지가 아무리 넓어도 도읍에서 멀면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다"며 눈물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우지사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천하를 차지하려는 전국무사의 야망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즈 와카마쓰로 옮겨간 우지사토는 히노와 마쓰자카에서 따라온 상인들을 아이즈 상인들과 합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히노 상인들의 명물인 '히노 그릇(히노완)' 기술을 아이즈 사람들이 익히면서 '아이즈 칠기'가 탄생하게 됩니다.
보통이라면 히노 상인들은 이세든 아이즈든 어디를 가든 '히노 상인'이라는 이름과 자존심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지사토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지 상인들과의 동화를 요구했습니다.
히노 상인 입장에서는 "함께 따라왔는데 우지사토 님은 고향 지명조차 신경 쓰지 않으시는가", "지금까지 히노 상인으로 살았는데 아이즈 상인이라 불리는 것은 분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우지사토는 전봉지의 지명을 바꾸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세로 이동할 때는 원래 여러 지역이던 땅을 '마쓰자카'로 통합하고, 히노 상인들에게 스스로를 마쓰자카 상인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만약 히노 상인들에게 다른 이름을 강요했다면 반발이 컸을 것입니다.
아이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즈 구로카와라는 지명을 그대로 두고 '구로카와 상인'이라 부르라고 했다면 강한 거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마쓰자카도 아이즈 와카마쓰도 새로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우지사토는 새것을 새 그릇에 담는 방식으로 상인들의 의식 개혁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아이즈 와카마쓰의 상인들에게 우지사토는 "새 지명 아이즈 와카마쓰에서 새로운 상인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당부했습니다. 위치는 그대로여도 간판을 바꾸고, 영주가 이 땅이 새것이라 선언한다면 상인들도 반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날카로운 경영 감각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모 우지사토는 40세가 되던 해 교토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아이즈의 땅에서 그 능력 때문에 천하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한 히데요시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예산 제도를 만들다
이세 마쓰자카 시절 50만~60만 석을 다스리던 우지사토는 아이즈에서 백만 석으로 늘어나자 부하들에게 "힘든 일이 많아졌다. 지금까지의 공적을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이 정도일 것이니, 봉록을 각자 스스로 신고해 달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부하들은 기뻐하며 자진 신고했지만, 신고된 액수가 너무 커서 중신들이 미래를 위해 조정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일본 최초의 예산 제도의 시작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