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히라가 겐나이] 발명가만이 아니었다! 재능 만점 직업 10가지

에도 시대에 정전기를 일으키는 장치는 상당히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 장치인 '에레키데루'를 손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 바로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입니다.

사실 그는 만든 사람이라기보다는 수리한 사람이지만요...

그래도 그가 해낸 일은 굉장합니다. 나가사키에서 손에 넣은 고장 난 '에레키데루'를 설명서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사용법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려 7년에 걸쳐 완벽하게 수리해 냈습니다. 완성된 모습조차 알지 못한 채 말이죠. 대단하지 않나요?

히라가 겐나이의 재능은 발명가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겐나이의 두뇌를 따라가지 못했고, 그는 평생 고뇌하게 됩니다... 천재여서 고통받는 인생...

너무 일찍 태어났다고까지 평가받는 히라가 겐나이의 기묘한 운명을 소개합니다.

히라가 겐나이, 간단 프로필

[히라가 겐나이] 발명가만이 아니었다! 재능 만점 직업 10가지

생몰년: 1728~1780년. 에도 시대 중기,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제9대 쇼군의 시대였습니다.

사누키국(현 가가와현)의 아시가루(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1세 무렵, 신을 그린 병풍 앞에 술병을 놓으면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가라쿠리(자동 장치)를 고안해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13세 무렵, 본초학(本草學, 중국에서 발달한 의약학), 유학, 하이카이(俳諧, 하이쿠의 원류)를 배웠습니다.

25세 무렵, 네덜란드 무역의 관문이었던 나가사키 데지마에서 1년간 본초학, 네덜란드어, 의학, 서양화를 공부했습니다. 이국 문화에 큰 자극을 받은 겐나이는 누이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한 뒤, 스스로 집안을 떠났습니다.

28세 무렵,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에도에서 본초학과 한학(중국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두 번째 나가사키 방문에서는 광산 채굴·제련 기술을 익혔습니다.

30세 무렵, 다카마쓰번(가가와현)의 가신으로 일했지만 답답한 생활에 지쳐 32세 무렵 사직하고 다시 에도로 향합니다. 이때 자신의 번이든 다른 번이든 다시는 무사로 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됩니다.

같은 시기, 에도 막부의 로주(老中)로서 '뇌물 정치가'와 '개명 정치가'라는 찬반이 엇갈렸던 다누마 오키쓰구, 그리고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의학서 '해체신서(解體新書)'로 유명한 스기타 겐파쿠와 교류하게 됩니다.

35세 무렵,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고 외국 서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38세 무렵, 오쿠치치부에서 광산 개발에 착수해 석면(石綿)을 발견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석면은 내구성과 내열성이 뛰어나 가전제품, 전기 제품, 건축 자재 등에 활용되는 소재입니다.

45세 무렵, 데와 아키타번(아키타현)의 초청을 받아 광산 개발과 난란(蘭畫, 서양화) 기법을 지도했습니다.

49세 무렵, 7년에 걸친 '에레키데루' 수리에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52세, 다이묘 저택의 수리 공사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수리 설계도를 도둑맞았다고 오해한 목수 두 명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는 설계도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죄로 투옥된 뒤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입니다.

히라가 겐나이의 10가지 직업!

[히라가 겐나이] 발명가만이 아니었다! 재능 만점 직업 10가지

① 본래 본초학(약학) 학자
약물학을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② 일본 최초의 물산 박람회 개최
교통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에도 시대에 전국의 진귀한 광물과 약초를 모아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홍보 전단지도 직접 제작했다고 합니다. 5회째 박람회에서는 1300종의 출품작을 선보였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출품작 도감(그림책)까지 출판했습니다.

③ 발명가
일본 최초의 만보계 '량보계(量歩計)'를 발명했습니다.
불에 타지 않는 천 '화섬포(火浣布)'를 발명했습니다. 치치부산에서 석면을 발견하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밖에 온도계, 나침반 등도 발명했습니다.

④ 일본 최초의 모방(毛紡) 산업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질 좋은 모직물의 국산화를 목표로 양 사육부터 시작했습니다.

⑤ 광산 기술자
광산 개발 사업을 벌였지만 금을 찾지 못했고, 이후 아키타번으로 가서 광산 개발을 지도했습니다.

⑥ 도공(도자기 장인)
나가사키에서 도자기가 비싸게 팔리는 것을 알고 '겐나이야기(源内焼)'라는 도자기를 만들어 해외에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⑦ 화가
일본 최초의 서양화 '서양 미녀도(西洋婦人圖)'를 그렸습니다. 아키타번에서 서양화를 가르친 제자는 훗날 의학서 '해체신서'의 삽화를 담당했습니다.

⑧ 작가
'풍래산인(風来山人)', '복내외기(福内外鬼)' 등 필명으로 쓴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가부키로 공연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방귀에 대해 논한 '방탄론(放屁論)'이라는 책도 남겼습니다.

⑨ 일본 최초의 카피라이터
"복날의 우시(土用の丑の日)에는 장어를 먹어라"는 카피가 바로 겐나이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덕분에 장어 가게는 크게 번창했습니다. 치약 광고송도 직접 작사·작곡했습니다. 최초의 신사용 '하마야(破魔矢, 화살형 부적)'도 겐나이가 고안했다고 전해집니다.

⑩ 진귀석·기석(奇石) 중개상

말년의 히라가 겐나이!

에레키데루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처음에만 놀랄 뿐, 붐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어떤 직업도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를 '꼭두각시 인형사'라고 불렀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더 절망적으로 다가왔고, 결국 투옥이라는 사태를 맞게 됩니다. 에레키데루 수리라는 위업을 달성한 지 겨우 2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겐나이는 서류상으로는 사망 처리됐지만, 실제로는 감옥에서 몰래 빠져나와 다누마 오키쓰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소문에 불과하지만요...

마무리

겐나이는 남다른 행동력과 실행력으로 '천재', '괴재'라 불렸지만, 새로운 것을 세상에 인정받게 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혹은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생전에 제 값을 제대로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 번을 실패해도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한 겐나이의 인생은 분명 매우 충실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