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기원전 322~297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차나키야(카우틸랴)의 도움을 받아 난다 왕조의 마지막 군주 다나난다를 축출하고, 기원전 322년 마가다 지역에서 마우리아 제국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고대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제국 확장 과정에서 찬드라굽타는 그리스계 군주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와 충돌했으며, 이후 양측은 화친 관계를 맺었습니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대사로 메가스테네스를 찬드라굽타의 궁정에 파견했고, 메가스테네스는 파탈리푸트라에 머무는 동안 마우리아 제국의 모습을 기록한 저서 『인디카(Indica)』를 집필했습니다. 참고로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문헌에서 '산드로코토스(Sandrokotto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찬드라굽타는 소라슈트라, 말와, 아반티를 비롯해 남인도의 일부 지역까지 마가다 제국에 편입시켰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60만 명의 병력으로 인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전해집니다.
만년의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 승려 바드라바후를 따라 출가하여 오늘날 카르나타카주의 스라바나벨라골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찬드라기리 산에 머물며 자이나교 전통에 따라 금식을 행하다가 기원전 297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빈두사라 (기원전 297~273년)
기원전 297년 찬드라굽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빈두사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스 작가들은 그를 '아미트로차테스(Amitrochates)'라 불렀는데, 이는 '적을 멸한 자'라는 뜻의 호칭을 그리스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빈두사라 재위 기간에 서부 도시 탁실라에서 두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반란은 아쇼카가, 두 번째 반란은 수시마가 진압했습니다. 또한 빈두사라는 아지비카 교파를 후원한 최초의 마우리아 군주로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273년에 사망했습니다.
아쇼카 (기원전 269~232년)
아쇼카는 기원전 273년 왕권을 계승했지만, 약 4년간의 왕위 계승 내전에 휘말리면서 실제 대관식은 기원전 269년에야 거행되었습니다.
대관식 8년째 되는 해, 즉 기원전 261년 아쇼카는 칼링가를 공격했습니다. 칼링가 전쟁에서 목격한 광범위한 폭력과 참화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는 무력에 의한 정복 대신 '법(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구하기로 결심하고 승려 우파굽타로부터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인 아쇼카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아들 마헨드라와 딸 상가미트라를 스리랑카에 보내 불교 포교에 힘썼으며, 사찰 방문 여행 대신 불교 성지를 순례하는 '담마 여행'을 장려했습니다. 또한 즉위 13년째에는 법의 확산과 백성의 복지를 담당하는 특별 관직 '담마마하마트라'를 신설했습니다.
아쇼카의 비문은 브라흐미 문자, 그리스 문자, 카로슈티 문자(아람 문자 계통)로 새겨졌으며, 비문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일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마우리아 제국의 행정 제도
메가스테네스는 『인디카』에서 마우리아 제국의 도시 행정을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 행정은 3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담당했으며, 이 위원회는 각각 5명씩 6개의 소위원회로 나뉘어 운영되었습니다.
마우리아 시대에 주(州)는 '차크라'라 불렸으며, 몇 개의 구획으로 세분되었습니다. 민사 재판은 '다르마스티야', 형사 재판은 '칸타카쇼다나'라는 법원에서 담당했습니다. 이 시기의 첩보 요원은 '구다푸루샤(숨은 사람)'라 불렸습니다. 도시에는 산업·상업 관련 위원회와 일반 행정 위원회 등 두 종류의 위원회가 있었으며, 도로 건설을 전담하는 관리도 별도로 두었습니다.
마우리아 제국의 주요 주와 수도
| 주(州) | 수도 |
| 우타라파타 | 탁실라 |
| 다크시나파타 | 수바르나기리 |
| 아반티 | 우자인 |
| 프라치 | 파탈리푸트라 |
| 칼링가 | 토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