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

인도 독립의 역사 – 비하르와 함께 걸어온 자유의 여정

이 글에서는 인도 독립의 역사를 상세히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부터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자주국가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비하르 지역에서 전개된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간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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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의 역사

영국 총선과 내각 임무단의 방문 (1945~1946)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영국에서 총선이 실시되어 노동당이 집권했습니다.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인도에 대한 권력 이양을 추진했으며, 1946년 3월 24일에는 페식 로런스, 스태퍼드 크립스, A.V. 알렉산더 등 영국 내각 각료 세 명으로 구성된 '내각 임무단(Cabinet Mission)'이 인도를 방문했습니다.

임무단은 입헌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들을 제시했지만, 폭넓은 동의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전국 단위 선거가 실시되었고,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 간의 대립으로 정부 구성이 한동안 지연되었으나, 결국 1946년 12월 2일 국민회의 주도로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 정부에는 비하르 출신의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와 자그지반 람이 참여했습니다.

제헌의회의 개막과 독립 (1946~1947)

1946년 12월 9일, 독립 인도의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제헌의회 회의가 임시 의장인 사치다난드 신하 박사의 주재로 개막되었습니다. 이후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가 제헌의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국토 분할 문제에 대해 국민회의와 무슬림연맹이 합의에 도달한 뒤, 마침내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후 1950년 1월 26일 인도 헌법이 발효되면서 비하르는 인도 연방의 한 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주자치와 비하르의 선거

1935년 인도 통치법에 따라 주자치(provincial autonomy) 실시가 결정되면서 각 주에 책임정부를 수립할 길이 열렸고, 모든 정당이 선거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같은 해 비하르에서는 주 콩그레스 위원장 스리 크리슈나 싱의 주재 아래 콩그레스 창당 50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또한 1936년 1월에는 6년간의 중단 끝에 파트나에서 비하르 정치회의 제19차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는 람다얄루 싱이 주재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는 비하르 곳곳을 방문하며 국민회의를 위해 활발히 유세를 벌였습니다. 1937년 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비하르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러졌는데, 국민회의는 107명의 후보를 내워 그중 98명을 당선시켰고, 양원을 합산해 절대 다수를 확보했습니다. 이후 콩그레스 회의에서 각 주에 내각 구성이 허용되었습니다.

무함마드 유누스, 비하르 초대 수상이 되다

내각 구성 초청을 받은 스리 크리슈나 싱은 주지사 M.G. 핼럿에게 특별권한 행사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정부 수립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제2야당인 독립당의 무함마드 유누스에게 조각 초청이 전해졌고, 그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이렇게 무함마드 유누스는 비하르의 초대 인도인 수상(당시 주정부 수장은 '프라임 미니스터'라 불렸음)이 되었습니다. 1937년 4월 1일 구성된 이 내각에는 와와 알리, 쿠마르 아짓 P. 싱, 구루 사하이 랄 등이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콩그레스는 주지사의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습니다. 1937년 6월 21일, 부왕 린리스고 경이 인도인 각료들의 입법 업무에 주지사가 간섭하지 않겠다고 보증하자, 콩그레스 집행부는 정부 수립을 결정했고, 결국 유누스 내각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리 크리슈나 싱 내각의 출범과 붕괴

1937년 7월 20일, 스리 크리슈나 싱을 수반으로 하는 콩그레스 내각이 비하르에서 출범했습니다. 이 내각에는 아니그라 나라얀 싱, 사이예드 모하마드 박사, 자글랄 차우두리 등이 참여했으며, 람다얄루 싱이 입법의회 의장으로, 압둘 바리가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전쟁에 끌어들이기로 결정하자, 국민회의는 항의의 표시로 정부와의 협력을 중단했습니다. 그 결과 전국 각 주의 정부가 해체되었고, 비하르에서도 스리 크리슈나 싱이 1939년 10월 31일 사임하며 내각을 해산했습니다.

1946년 재선거와 폭동의 참화

1946년 3월, 비하르에서 다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의회 152석 중 국민회의가 98석, 무슬림연맹이 34석, 모민당이 5석, 부족 대표가 3석, 무소속이 12석을 차지했습니다. 같은 해 3월 30일 스리 크리슈나 싱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지만, 무슬림연맹은 국민회의 주도의 과도정부 수립에 격렬히 반발했고,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비하르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차프라, 반카, 제하나바드, 문게르 등지에서 피해가 특히 컸으며, 라젠드라 프라사드 박사와 아차르야 크리팔라니는 국민들에게 평화 유지를 호소했습니다. 1946년 11월 6일에는 간디가 비하르에 보내는 서한을 통해 다시 발생한 폭동에 대한 깊은 슬픔을 표명했고, 판디트 자와할랄 네루도 비하르를 방문해 폭동 피해 지역을 직접 시찰했습니다. 한편 제헌의회가 개막될 당시 무슬림연맹 의원들은 불참했습니다.

독립으로 가는 마지막 길 (1947)

1947년 2월 20일, 영국 총리 애틀리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 통치권을 이양하겠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 무렵인 같은 해 3월 5일 간디가 비하르를 방문해 머무는 동안 기도와 평화, 화합의 메시지를 계속 전했습니다. 이어 3월 14일에는 루이스 마운트배턴 경이 인도 부왕으로 부임했습니다.

1947년 7월 인도 독립법이 영국 의회에 제출되었고, 마침내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두 개의 독립국가로 탄생했습니다. 국가 독립이라는 감격적인 순간, 비하르에서도 축하의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독립 인도에서 자이람 다스 다울랏 람이 비하르의 초대 주지사로, 스리 크리슈나 싱이 초대 주총리로 임명되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