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상나라, 곧 은나라의 수도를 안양 한 곳으로만 떠올립니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된 왕도는 안양의 은허(殷墟)가 유일하지만, 문헌 기록을 보면 은나라는 건국 이후 여러 차례 수도를 옮긴 '천도(遷都)의 왕조'였습니다.
전통적인 기록인 『사기』에 따르면, 시조 탕(湯)은 박(亳)에 도읍을 정했고, 이후 중정(仲丁)이 오(隞, Ao)로, 하단갑(河亶甲)이 상(相)으로, 조을(祖乙)이 형(邢)으로, 남경(南庚)이 비(庇)로 천도했으며, 마침내 반경(盤庚)이 은(殷), 즉 오늘날의 안양으로 옮겼습니다. 다시 말해 오(Ao)는 '첫 번째 왕의 이름'이 아니라, 초기 은나라가 도읍했던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양만 이렇게 잘 알려져 있을까?
1. 문자가 나온 땅, 갑골문
결정적인 이유는 글자입니다. 19세기 말 안양에서 출토된 거북 등딱지와 소 뼈에 새겨진 갑골문(甲骨文)이 학계에 알려지면서, 은나라는 신화가 아니라 문자로 기록된 역사 속 왕조가 되었습니다. 갑골문에는 왕의 이름, 제사, 전쟁, 사냥, 날씨까지 새겨져 있어 무정(武丁) 이후 왕들의 계보를 거의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를 비롯한 초기 수도에서는 이런 문자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 체계적인 발굴과 풍부한 유물
1928년부터 시작된 안양 은허의 공식 발굴은 중국 근대 고고학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샤오툰(小屯) 일대의 궁전·종묘 지구, 허우자좡(侯家莊)의 왕릉, 그리고 세계 최대급 청동기인 허우무우 방정(后母戊方鼎) 같은 걸작들이 잇달아 출토되었습니다. 도시 구조, 왕릉, 청동기 공방, 주거지까지 드러나면서 '수도'의 실체가 선명해졌습니다.
3. 보존 상태의 차이
안양은 은나라 멸망 이후 큰 도시로 다시 성장하지 않아, 유적이 후대 건축물 아래에 깊이 파묻히지 않았습니다. 반면 오로 추정되는 유적은 오늘날의 정저우(鄭州) 시가지처럼 대도시 지역에 있다는 견해가 유력해 발굴과 조사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오가 정저우 상성(鄭州商城)인지, 옌스(偃師) 상성인지, 혹은 박(亳)과 동일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학계의 논쟁도 아직 진행형입니다.
미지의 영토로 남은 초기 수도들
요컨대 우리가 안양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은 은나라에 수도가 하나뿐이어서가 아니라, 안양에서만 문자와 함께한 결정적인 증거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를 비롯한 초기 수도들은 위치와 성격조차 확정되지 않은 미지의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갑골문에 버금가는 기록이 발견되는 날이라야, 비로소 은나라 초창기의 역사가 온전히 빛을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