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대통령으로서는 무능했지만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미국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대공황 앞에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후버 모라토리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는 대공황에 맞서 '후버 모라토리엄'이라 불리는 사실상의 무대응 정책을 내놓아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던 인물입니다.

대공황의 여파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계획경제에 대한 권위를 강화시켰고, 독일에서는 나치가 득세했으며, 일본 제국주의 또한 힘을 얻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후버

대통령으로서는 무능했지만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자였던 미국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허버트 후버는 아이오와주에서 퀘이커 교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퀘이커교는 기독교의 한 종파로, 그 시초는 영국 청교도 혁명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버는 1891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런던에 본사를 둔 광업 기술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지원 아래 벨기에에 대한 구호 활동에 나섰습니다. 이후에는 벨기에 외의 유럽 지역에도 식량 지원을 제공하며 '위대한 인도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공로로 공화당의 총애를 받게 된 후버는 하딩이 대통령이 되자 상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하딩 사후 쿨리지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상무장관직을 계속 수행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국가가 시장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덕분에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후버는 1927년 미시시피강 대홍수 때도 적극적으로 구호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후버는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29년 10월,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주가 폭락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전 세계로 번져나갔습니다. 바로 역사에 남은 '대공황'입니다.

"시장의 일은 시장에 맡겨라." 이것이 공화당의 기본 노선이었습니다. 후버만이 아니라 당시 미국의 모든 권력층이 이러한 국가 불개입 원칙을 지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버는 이 전례 없는 위기 앞에서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번영은 코앞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1930년, 후버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인상하고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제정했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역시 '블록 경제'라 불리는 자국 영역 내에서만 경제 활동을 수행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후버가 한 일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1931년에는 은행 등 금융기관이 도미노처럼 연쇄 파산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후버는 독일의 구매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독일에 대한 배상금 납부를 유예하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발표했지만, 당연히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극심한 혼란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나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결국 후버는 재선에 실패했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퇴임 이후의 후버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버는 유럽을 방문해 나치의 지도자 히틀러 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치에게 유럽이 넘어가고 영국이 홀로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우고 있을 때조차, 후버는 영국 지원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그런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흐르고 있었지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을 응징할 명분을 얻었고, 소련과의 전쟁으로 스스로 멸망의 불씨를 지핀 독일로서는 더 이상 추축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1%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 후버는 스탈린을 몹시 싫어했고, 스탈린과 손잡은 루스벨트와 처칠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맥아더를 만났을 때는 진주만 공격이 루스벨트가 전쟁의 명분을 찾다가 일본을 이용해 설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후버는 196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0세였습니다.

대통령으로서는 실패했지만 위대한 인도주의자

안타깝게도 후버는 대통령으로서는 거의 무능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전후에는 일본과 독일에 식량 지원을 적극적으로 제공했습니다. 후버가 없었다면 일본의 전후 재건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직을 제외하면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버는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도 식량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이념, 신념, 인종을 불문하고 식량 지원을 펼쳤다는 점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우드로 윌슨과 함께 가장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버는 대공황의 원인이 아니었고, 위기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케인스의 수정 자본주의는 대공황 이후에야 등장한 것이며, 훗날의 시점과 당시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평가하더라도, 대공황이 만연하게 확산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대통령으로서 무능했다는 평가가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