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에 대해 뚜렷한 인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미국 역사에서 '번영의 시대'로 불리는 동시에, 훗날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위기의 복선이 깔려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캘빈 쿨리지

쿨리지는 1872년 7월 4일, 미국 건국기념일에 버몬트주에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주 앰허스트 칼리지(Amherst College)에서 수학한 뒤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899년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턴(Northampton) 시의회 의원에 선출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1907년부터는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에는 노샘프턴 시장에 당선되었고, 1912년 다시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이후 1919년 매사추세츠주 주지사에 올랐다.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쿨리지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23년 하딩이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제30대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존재감 없는 대통령, 그러나 번영의 시대
쿨리지는 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이 된 후에도 존재감이 크지 않은 인물이었다. "캘빈 쿨리지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재임 중 가장 기억할 만한 업적을 꼽자면, 1924년 백악관에서 최초로 라디오 연설을 진행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현대 대중매체를 활용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초석을 놓은 순간이었다.
배외적 이민법과 '황화론'의 시대
쿨리지 집권기에는 일본인 이민을 사실상 차단하는 배외적 이민법(1924년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백인 사회가 가장 경계한 것은 사회주의 정부의 성장이 아니라 '황인종'의 부상이었다. 그보다 앞서 독일의 빌헬름 2세는 '황화론(Yellow Peril)'을 대대적으로 설파한 바 있다.
황화론은 황인종이 세계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주장으로, 역사적으로 유럽이 훈족, 헝가리인, 몽골 제국의 침입을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종의 유전적 차원의 위협감까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백인 사회에서 일본의 존재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본은 백인 국가도, 기독교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층의 논리는 "세계의 지배자는 신을 따르는 기독교 신자이자 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혐오가 응축된 결과물이 바로 배외법이었다.
흥미롭게도 쿨리지 본인은 이 이민 규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의회의 강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안에 서명했다고 전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호황이 이어진 나라
이렇듯 쿨리지는 임기 내내 특별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쿨리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쿨리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라 자체가 계속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끝없이 상승하는 듯했고, 그 번영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몰락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붕괴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29년 대공황이 닥치면서 '쿨리지 호황'의 환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쿨리지는 1933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