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과 케네디는 여러 면에서 닮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재임 중 암살당했다는 점, 그리고 뒤를 이은 부통령의 성이 모두 '존슨'이었다는 점은 가장 기묘한 일치로 꼽힙니다.
그렇다면 링컨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남부 출신 대통령
앤드루 존슨의 가장 큰 특징은 전형적인 남부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링컨의 임기와 남북전쟁 시기는 거의 겹치는데, 남북전쟁은 북부와 남부의 전쟁이었고 남부는 한때 연방에서 탈퇴했습니다. 그 탈퇴를 처음 선언한 주가 바로 사우스캐롤라이나였습니다.
존슨은 1808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재단사 견습생으로 보내졌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읽고 쓰는 법은 독학으로 익혀야 했습니다. 십 대 후반에 형과 함께 테네시주로 이주했고, 19세에 엘리자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본격적인 학습은 아내 엘리자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글읽기·쓰기·산술도 엘리자가 다듬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20세에 그린빌 지역 선거에 당선되었고, 1834년부터는 그린빌 시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에 선출되며 연방 의회에서 입지를 하나씩 굳혀 나갔습니다.
노예를 소유했던 대통령
남부 출신인 존슨은 당연하다는 듯 흑인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링컨이 존슨을 신뢰한 것은, 남부 각 주가 연방을 탈퇴했을 때 연방에 남은 유일한 남부 출신 상원의원이 존슨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북전쟁 이전 링컨의 소망은 남북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링컨은 남부 주민들과의 화해 정책을 추구했으며, 남부 출신 민주당원인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링컨이 암살되면서 앤드루 존슨이 제1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동적 정치를 펼친 앤드루 존슨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암살되었기 때문에, 전후 처리 즉 '재건(Reconstruction)'의 몫은 고스란히 존슨에게 돌아갔습니다.
부통령이 되기 전, 존슨은 연방군이 테네시를 점령했을 때 군정 장관으로 임명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남부 동조자들에게 엄격한 태도를 취해 공화당과 북부 인사들의 신뢰를 얻었고, 링컨의 노선을 계승할 것으로 기대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예상을 배신하고, 존슨은 반동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존슨은 남부 출신이면서도 남부의 기존 권력층에게 원한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남부의 모든 사람이 노예제를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일부 플랜테이션 소유주만이 노예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존슨이 남부에 가혹한 태도를 취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남부 지도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남부연합의 부채를 탕감하며 연방 복귀를 허용했습니다. 요컨대 남부의 권력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 지도자들은 이러한 존슨의 정책 덕분에 옛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돌아온 남부 지도자들은 '흑인법(Black Code)'이라 불리는 법률을 통과시켜, 흑인들이 더 이상 노예 신분은 아니더라도 법적으로 백인과 구별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존슨은 반동 정치를 계속 추진하며 의회가 발의한 '공민권법'과 '해방노예국법'을 거부권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이 두 법은 해방된 노예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존슨은 흑인 구제에 연방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의회는 존슨의 반동 정치에 강하게 반발했고, 1868년 존슨 대통령은 탄핵소추를 받게 됩니다. 상원 심판 결과 찬성 35표, 반대 19표로 과반수를 넘겼지만 파면에 필요한 정원의 3분의 2에는 미치지 못해 파면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대통령이 하원에서 탄핵소추를 받은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앤드루 존슨과 스캔들 혐의로 소추된 빌 클린턴이 대표적이며, 이후 도널드 트럼프도 두 차례 소추되었습니다. 다만 상원에서 3분의 2의 찬성표를 얻어 실제로 파면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습니다.
존슨은 임기 내내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와 끊임없이 대립했고, 거부권(베토)을 총 29차례 행사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기록이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의회가 재가결로 뒤집었습니다.
임기를 마친 뒤 그는 국민적 지지를 완전히 잃고 두 차례의 선거에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1875년에야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지만,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앤드루 존슨에 대한 평가
그는 평가할 만한 업적이 거의 없는 대통령입니다. 재건 시기의 잘못된 판단과 남부 옛 권력층에 대한 일관된 온정으로 인해, 오늘날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늘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