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이 무렵 미국은 '금도금 시대(Gilded Age)'라 불리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급격한 사회 발전에 따른 여러 문제 앞에서 별다른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인물이 바로 제19대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였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러더퍼드 B. 헤이스
헤이스 가문은 17세기 전반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미국 최고(最古)의 이민자 가문 중 하나로, 헤이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 정착했습니다. 아버지는 헤이스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지며,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 속에서 자랐습니다.
학업에 두각을 나타낸 헤이스는 오하이오주의 케년 칼리지(Kenyon College)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변호사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습니다. 1862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소장까지 올라갔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 대부분은 군 지휘관 출신이거나 변호사 출신인데, 두 배경을 모두 갖춘 대통령은 드물다는 점에서 헤이스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의 당선
헤이스는 187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습니다. 최종 선거인단 표는 185표 대 184표로 단 한 표 차이였고, 일반 국민의 직접 투표 수에서는 오히려 상대에게 밀린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큰 논란을 낳았고, 반드시 선거 부정이 있었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는 남북전쟁 이후의 재건 시기였기 때문에, 남부와의 뒷거래가 있었으리라는 소문도 널리 퍼졌습니다. 결국 헤이스는 '사기꾼 각하(His Fraudulency)'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미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헤이스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남부에 주둔하던 연방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에서 흑인에 대한 린치와 폭력 사망 사건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지만, 헤이스는 "흑인 문제는 남부 사람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며 이런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헤이스는 노동 문제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부유층과 권력층을 위한 정치를 구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랜트 행정부 이후 계속 성장해온 산업 자본가 중심의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대는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금도금 시대'라고 불립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사람들은 오직 황금에만 관심을 두었으며, 이상은 사라지고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통령 헤이스는 바로 그런 시대의 화신이라 할 만큼, 정책 면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헤이스의 말년

헤이스는 임기 중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188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존재감이 옅었던 그였지만, 임기 종료 후에는 교육 문제에 매진했으며, 미국 사회에서 점점 벌어지는 빈부 격차를 한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아마도 로크펠러를 비롯한 산업 자본가들의 권력이 대통령보다 더 강력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이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893년, 헤이스는 오하이오주에 있던 자택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향년 70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