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막부 제2대 쇼군,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한나라 제2대 황제, 명나라 제2대 황제… 이들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역사 속 '두 번째' 인물은 의외로 잘 기억되지 않는 법입니다. 미국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의 이름을 즉각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고,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다방면에서 활약한 실무형 정치가
스포츠든 역사든, 스타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빛나는 주역 뒤에는 조용히 기반을 다진 인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자란 존 애덤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미국 독립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영국의 혈통을 이어받아 출생 배경의 영향이 실제로 매우 큰 미국 사회에서, 농민 계급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오른 경우는 드뭅니다.
애덤스 가문은 1630년대 미국에 정착한 농민의 후손으로, 이후 대대로 청교도(개신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이었습니다. 존의 아버지 역시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목회자로도 활동했다고 전해집니다.
부유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재능이 뛰어났던 존 애덤스는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몇 년간 교사로 일했고, 이후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28세 무렵에는 목사의 딸 애비게일 스미스(Abigail Smith)와 결혼해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훗날 미국 제6대 대통령이 되는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입니다.
그는 1765년 영국 본국의 인지세법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고, 1770년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에서 영국군 병사들을 변호인으로서 방어했습니다. 같은 해 매사추세츠 식민지 의회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이후 1774년 대륙회의에서 매사추세츠 대표로 참석해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추천했습니다.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립전쟁이 격화되자, 존 애덤스는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의 활약과 부통령 시절
미국 독립전쟁 이후 그는 유럽에서 외교관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의 중재로 영국과 체결된 파리 조약(1783년)에서 미국 대표로 참여했으며, 유럽 주재 전권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대서양에서의 어업권과 미시시피 강 동쪽 땅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고, 네덜란드·프로이센 등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 관계 구축에도 성공했습니다. 이는 독립 직후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존 애덤스는 부통령으로서 그를 보좌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이 세 번째 임기 출마를 원치 않아 물러나면서, 존 애덤스는 미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프랑스와의 유사전, 그리고 대통령직의 끝
애덤스의 재임 기간은 당파 간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특히 훗날 제3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제퍼슨과의 대립이 두드러졌습니다.
그의 재임 중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미국을 영국의 편으로 간주해 미국 상선을 나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유사전(Quasi-War)'이라 부릅니다.
프랑스에 대한 대응을 두고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지만, 1798년 프랑스가 미국을 공격하면서 양국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때 존 애덤스는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해 미국 해군을 창설했습니다.
한편 그는 외교관 윌리엄 밴스 머레이(William Vans Murray)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파견했고, 협상 끝에 양국은 화해하여 전면전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외교관 파견이 존 애덤스의 독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며 국론이 분열되었고,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당선되어 제3대 대통령이 됩니다.
참고로 바로 이 무렵 워싱턴 D.C.의 백악관이 완공되어, 존 애덤스는 백악관에 입주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선거 패배의 충격이 컸던 모양입니다. 존 애덤스는 제퍼슨의 취임식에 불참하고 고향 매사추세츠로 돌아가 다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제퍼슨과 화해했으며,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바로 그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90세. 흥미롭게도 같은 날 토머스 제퍼슨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장수 기록은 로널드 레이건이 경신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존 애덤스에 대한 평가
그는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강력한 카리스마형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무 능력은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해군 창설과 유럽 각국과의 협상 등을 통해 미국의 기반을 다졌으며,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번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러 당파의 분화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고, 그가 헌법 초안에서 노예제 금지 조항을 삭제한 인물 중 하나라는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당시 초안 단계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제 폐지 조항을 헌법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많은 건국 지도자들이 농장주였기 때문에 이 조항은 삭제되었습니다.
존 애덤스는 평생 노예를 구입하거나 사용한 적이 없었고, 아내 애비게일 역시 노예제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독립 당시 13개 주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해당 조항의 삭제에 동의했습니다.
다만 존 애덤스는 노예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고향 매사추세츠에서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에도 미국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았고, 결국 19세기 중반 북부와 남부 사이에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히는 대규모 내전, 즉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비인도적인 행위임을 알면서도 노예제를 묵인해야 했던 존 애덤스에게 어떤 평가가 어울릴까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무거운 고민과 딜레마를 안고 살았다는 사실만 떠올려 보면, 존 애덤스가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농사를 짓고 싶었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