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되지 않은 두 임기를 지낸 유일한 대통령
미국 역사에는 재선에 성공해 두 임기를 연달아 지낸 대통령이 많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이어지지 않은 채, 즉 한 번 물러난 뒤 다시 당선되어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바로 제22대이자 제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입니다. 참고로 2025년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130여 년 동안 이 기록은 클리블랜드만의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는 1837년 뉴저지주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영국계 혈통을 이어받은 전통적인 미국인이었고, 어머니는 독일 이민 가문 출신으로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모세 클리블랜드(Moses Cleaveland)의 후손이었습니다.
가족은 이후 뉴욕주로 이주했지만, 클리블랜드가 열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잃으면서 생활은 어려워졌고, 그는 부유한 숙부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성장한 클리블랜드는 뉴욕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며 변호사 업무를 배웠고, 이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어 이리군 보좌 검사와 군 보안관(셰리프)을 거치면서 명성을 쌓았고, 뉴욕주 버팔로 시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소속으로, 188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당시 공화당 진영은 클리블랜드의 스캔들과 징병 회피 의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이를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고, 오히려 이러한 정직함이 신뢰를 얻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율리시스 그랜트 이후 공화당 대통령들이 계속 집권했지만, 공화당은 산업 자본가들과 깊이 결탁해 내부는 부패로 물들어 있었고, 노동 운동을 억압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크게 잃은 상태였습니다.
바로 이 무렵 '머그웜프(Mugwump)'라 불리는 개혁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부패한 공화당을 비판하고 정치를 '고결한 행위'로 회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퍼진 것입니다. 게다가 공화당 후보로 나선 제임스 블레인은 산업 자본가들과 유착된 사실이 드러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클리블랜드의 스캔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고, 민주당 소속의 클리블랜드는 미국 제22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제22대 대통령으로서의 클리블랜드
대통령으로서의 클리블랜드는 전통적인 개신교 윤리에 충실한, 마치 청교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면모 덕분에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원칙주의적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의회의 법안과 정책을 하나씩 행사 거부권(베토)으로 막아냈습니다. 첫 임기 동안 행사한 거부권만 400건을 넘겼는데, 그 이전 역대 대통령들의 거부권 행사 횟수를 모두 합쳐도 약 200건 남짓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예외 없는 구조조정'에 착수한 인물이었습니다. 참전 용사 연금의 남발 문제, 철도 건설 과정에서 특정 자본가에게 주어지던 특혜, 산업 자본가에게 유리한 관세 정책 등을 직접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개혁은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벤저민 해리슨에게 패배합니다. 흥미롭게도 클리블랜드는 일반 국민의 직접 투표에서는 승리했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패배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한 명입니다.
제24대 대통령으로서의 클리블랜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클리블랜드는 변호사로 복귀했지만, 곧 제24대 대통령을 가리는 선거에 다시 출마합니다.
벤저민 해리슨이 이끄는 공화당 정부는 다시 산업 자본가 편에 서서 정치를 펼쳤습니다. 1890년 매킨리 관세법이 통과되어 평균 관세율이 약 49.5%까지 치솟자 반대 여론이 거세졌고, 자본가 카네기가 운영하던 철강 공장의 파업 사태(홈스테드 파업)에서 정부가 카네기 쪽에 섰을 때 국민의 마음은 급격히 클리블랜드로 기울었습니다. 그렇게 클리블랜드는 재선에 성공합니다.
클리블랜드는 반(反)산업 자본가 정책을 분명히 했지만, 농업 문제, 통화 문제, 철도 산업의 불황이 겹치면서 1893년 대공황급 경제 위기가 닥쳤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인기는 급속히 식어갔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클리블랜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저술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매킨리 대통령이 미국-스페인 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미국 반제국주의 연맹(American Anti-Imperialist League)'을 결성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다시 나섰습니다.
1908년, 클리블랜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1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