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산업자본가에 순응한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대통령은 대부분 승전국인 북부 출신이거나 공화당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법칙대로, 공화당의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은 산업 자본가들과 결탁하며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습니다. 그 결과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제2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공화당의 독주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가 개신교적 신념에 기반해 산업 자본가들을 강하게 견제하자, 정국의 흐름은 다시 반전됩니다. 결국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이 제2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벤저민 해리슨

벤저민 해리슨은 제임스 가필드, 러더퍼드 B. 헤이스와 마찬가지로 오하이오주 출신입니다.

남북전쟁 이전에는 버지니아 출신 대통령이 많았지만, 전쟁 이후에는 오하이오 출신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는 남북전쟁이 미국 정치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리슨 가문의 시조는 1630년경 버지니아로 이주한 벤저민 해리슨이라는 인물입니다. 즉 해리슨 가문은 남부의 구질서와 북부의 신질서, 양쪽 통치 전통을 모두 이어받은 가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벤저민 해리슨의 아버지 존 스콧 해리슨 역시 정치인이었으며, 할아버지는 미국 역사상 최단 기간(31일) 재임한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입니다. 이처럼 그는 '대통령의 손자'로 태어났고, 훗날 할아버지를 이어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해리슨은 오하이오의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853년에 결혼하였고,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변호사 사무소를 열어 지역의 유력 인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연방군(북군)에 입대하여 종전 무렵에는 준장까지 올라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공화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8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이 선거에서 해리슨은 현직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일반 투표에서는 약 9만 표 차로 밀렸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233대 168로 승리하며 제2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드문 '일반 투표 패배, 선거인단 승리'의 사례였습니다.

제23대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산업자본가에 순응한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벤저민 해리슨 정부는 산업 자본가들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였습니다.

그의 재임 중 통과된 매킨리 관세법(1890년)은 관세를 평균 50% 수준까지 인상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했고, 셔먼 은 매입법은 정부가 매달 대량의 은을 매입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그 결과 외국 제품의 국내 가격이 급등하면서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산업 자본가들이 생산한 국산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고, 자본가들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클리블랜드가 산업 자본가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의회 법안에 거부권을 과감히 행사해 왔다면, 벤저민 해리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회에 순응했고, 결국 산업 자본가들에게도 순응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시기에 산업 자본가들을 견제하기 위한 셔먼 반독점법(1890년)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질적인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포석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법은 초기에는 노동조합 탄압에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국민의 심판은 다시 클리블랜드에게 돌아갔습니다. 18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클리블랜드가 해리슨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며, 미국 역사상 유일한 '불연속 재집권'이 실현되었습니다.

벤저민 해리슨은 정계 은퇴 후 변호사 활동과 저술에 몰두하다가 190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7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