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남북전쟁의 영웅! 미국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첫 번째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전쟁 영웅 출신과 변호사 출신이 많습니다. 남북전쟁 직후 집권한 미국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는 전쟁 영웅 대통령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의 영웅

남북전쟁의 영웅! 미국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율리시스 그랜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따온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1822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7세 때 토머스 해머 의원의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본명인 '히럼 율리시스 그랜트(Hiram Ulysses Grant)'가 아닌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로 등록하는 바람에 이후 평생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랜트는 장교가 된 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 중령까지 진급했지만, 과도한 음주 문제로 군에서 사임하고 이후 세인트루이스에서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연방 정부는 처음에 로버트 리에게 북군 지휘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버지니아 명문가 출신이었던 리는 이를 거절하고 남군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랜트는 북군 대위로 참전하여 1862년 도넬슨 요새 전투의 공적으로 장군으로 승진했고, 이후 실로(Shiloh), 빅스버그(Vicksburg), 채터누가(Chattanooga) 등지의 전투에서 계속해서 활약했습니다. 마침내 피터즈버그와 애포매톡스 전투에서 리가 이끄는 남군을 격파했고, 전쟁이 끝난 후 링컨에 의해 '연방 대장(General of the Army)'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그랜트에게 수여된 'General' 칭호는 조지 워싱턴 이후 처음으로 내려진 것으로, 링컨이 그를 얼마나 높이 신뢰하고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랜트는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처럼 인해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북전쟁 기간 그랜트의 지휘 아래 전사한 북군은 약 15만 4천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리가 지휘한 남군의 손실(약 19만 1천 명)보다 오히려 적은 수치입니다. 오늘날 그랜트는 남북전쟁 최고의 지휘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 제18대 대통령

남북전쟁의 영웅! 미국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

링컨이 암살된 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그랜트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육군의 정점에 올라섭니다.

그러나 존슨이 반동적인 정치를 펼치기 시작하자 그랜트는 크게 실망했고, 급진파 공화당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86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을 훌쩍 넘는 득표로 승리하며 당시 최연소 기록을 세우고 미국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랜트는 군인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정치가로서는 최악 수준으로 평가받습니다. 재임 기간은 '위스키 링 스캔들(Whiskey Ring)'로 대표되는 부패가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그랜트 본인은 부패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각료와 측근들이 잇달아 비리를 저질렀고, 재선에는 성공했으나 스캔들은 끊이지 않아 행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점차 하락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이른바 '도금 시대(Gilded Age)'에 접어들었으며, 여러 산업 자본가들이 정치 세력과 결탁하며 성장하는 시대였습니다.

전쟁 후 노예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커져가는 산업 자본가와 노동자 문제로 사람들의 관심이 옮겨갔습니다. 19세기 후반은 전 세계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시대였으며, 사회주의 세력이 도약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독일에서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수상이 반사회주의법 제정을 추진하던 시기였고, 국가와 결합한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 간의 대립 구도가 뚜렷해졌으며,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남부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어 KKK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과 린치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흑인 차별을 내세운 백인들이 구 남군 세력과 결합해 무장한 채 루이지애나 주 의회를 점거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랜트는 즉시 군대를 파견했지만, 주 의회 의사당에 군대가 진입한 것에 대해 여론이 그랜트를 질타했고, 이후 남부에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랜트는 군대 파견을 중단했습니다.

그 결과 남부에서 흑인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고, 악명 높은 '수감자 임대제(convict leasing system)'라는 제도가 탄생했습니다. 이는 흑인들에게 경미한 범죄를 뒤집어씌워 감옥에 가둔 뒤, 죄수들을 기업에 헐값에 빌려주는 제도였습니다.

인디언 정책 역시 전임자인 잭슨 대통령처럼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지만,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고 미국화를 강제하며 문화적 억압을 가했고, 수우족 강제 이주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를 내는 등 결코 인도적이지 못한 정책이었습니다.

결국 그랜트는 뚜렷한 업적 없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됩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그랜트는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일본에도 들러 하마리큐 정원에서 메이지 천황과 회담을 가졌으며, 미국 대통령 경력자로서는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1885년 그랜트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집필한 회고록은 임종 며칠 전에 완성되었고, 사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율리시스 그랜트에 대한 평가

고대 로마에는 군인과 문관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훌륭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고, 원래는 변호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군인과 정치가 양쪽에서 모두 성공한 사람은 드물어졌습니다. 그랜트는 바로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랜트는 군인으로서는 탁월했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링컨 이후 존슨과 그랜트가 남부에 대해 펼친 유화적인 정책으로 인해 흑인 차별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반면 이 시기 미국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카네기와 록펠러처럼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산업 자본가들이 탄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