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제4대 대통령의 삶과 업적

미국 문화는 할리우드 영화 등을 통해 익숙하지만, 정작 미국 역사에 대해 깊이 배울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제2대와 제3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제4대가 되면 이름조차 생소한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이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연방 의회 의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

미국의 대통령은 의회 의원 중에서 선출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나 정치인 경력이 전혀 없어도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은 대륙 회의와 주 의회 의원을 지냈지만, 제4대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연방 의회' 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매디슨은 버지니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시니어는 약 5,000에이커(약 20㎢)에 달하는 광대한 농장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장남으로 태어난 매디슨에게는 형제자매가 열두 명이 있었고, 그 가문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지주 계급의 자녀답게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1769년 18세에 오늘날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해 언어, 과학, 수학, 수사학, 철학 등을 폭넓게 공부했습니다. 법학도 익혀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고, 1776년부터는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무렵부터 토머스 제퍼슨과 가까워지며 그의 제자처럼 지냈고, 1780년경에는 대륙 회의 대표로 참여했으며, 1784년에는 다시 버지니아 주 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 회의에서 그가 작성한 초안이 미국 헌법의 토대가 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해밀턴 등과 함께 『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매디슨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제3대 대통령이 되자 매디슨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Marbury v. Madison)'으로 이름을 알렸고, 루이지애나 매입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은 대법원이 위헌 입법 심사권을 확립한 최초의 판례로 유명하며, 현대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1808년, 매디슨은 제퍼슨의 뒤를 이어 미국 제4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1812년 전쟁과 백악관의 소실

재임 중이던 1812년 영국과의 전쟁(미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군 장군이 적 앞에서 물러서고, 매디슨 본인도 워싱턴의 백악관을 버리고 피신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백악관은 영국군에 의해 불탔고, 미국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간접적으로 미국을 도운 것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였습니다. 영국은 유럽 전선에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영국 역시 대프랑스 전선에 국비를 쏟아붓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찾지 못해 양국은 강화에 합의했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나라의 무승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한편 매디슨 재임 기간에는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세력과의 '제2차 바르바리 전쟁'도 치러졌으며, 이를 통해 지중해에서의 안전한 항해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했고, 1826년 토머스 제퍼슨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버지니아 대학교의 총장직을 맡았습니다. 1836년, 제임스 매디슨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에 대한 평가

제임스 매디슨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두각을 내세우지 않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받는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미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물론, '제임스 매디슨 대학교', '매디슨 산맥', '매디슨 강' 같은 지명은 물론 원자력 잠수함의 이름까지, 매디슨의 흔적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입법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 헌법이라는 국가의 초석을 놓은 공로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반면 1812년 전쟁에서 적 앞에서 후퇴한 듯한 군사적 업적은 없었고, 매디슨조차 노예제 문제를 두고 고민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미국 역사를 이야기할 때 노예제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갈리곤 합니다.

독립 직후의 미국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없이는 농업 생산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북부의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중심의 남부 사이의 갈등은 노예제 찬반 문제로 발전했고, 결국 미국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 문제는 매디슨 재임 기간에도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산업혁명은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이 허드슨 강에서 증기선을 운항한 것처럼, 미국 사회는 급속하게 공업화되어 갔습니다. 어느 면에서 보면 제임스 매디슨의 재임 기간은 입법을 포함해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초가 다져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책무를 다한 대통령, 그것이 제임스 매디슨입니다. 공격적인 리더십만이 능력은 아니며, 이런 수비형 정치인이야말로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에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