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업적은 화려하지만, 개인적으로 평가하기 애매한 대통령
개인적인 감정을 말씀드리자면 별로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는 정치적으로는 눈부신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버지니아 출신의 다섯 번째 대통령

제임스 먼로 역시 토머스 제퍼슨 등과 마찬가지로 버지니아의 지주 계층 출신입니다. 미국 최초의 식민지가 버지니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초대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대통령 중 네 명이 버지니아 지주 출신이라는 사실은 흥미롭게도 읽힙니다.
먼로는 토머스 제퍼슨처럼 윌리엄 앤 메리 대학(College of William & Mary)에 입학했지만, 렉싱턴·콩코드 전투가 일어나던 시기에 학업을 접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워싱턴 군대와 함께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전투에서 부상까지 입은 참전 용사입니다.
독립 이후에는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 버지니아에서 토머스 제퍼슨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1782년 버지니아 주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83년부터 1786년까지는 연합회의(Confederation Congress)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1790년 상원의원이 되었고, 1791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794년에는 프랑스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랑스 체류 당시 혁명 직후의 격동기 속에서, 루이 16세 처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석방에 기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혁명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지지한 나머지, 결국 조지 워싱턴에 의해 프랑스 주재 공사직에서 해임됩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영국 등 유럽 열강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립 노선을 취하고 있었는데, 먼로의 친프랑스 행보는 이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미국은 여러 나라의 사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경향이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 외교의 기본 노선은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고립주의였습니다.
귀국 후 먼로는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습니다. 이 시기 버지니아에서는 자유 흑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노예의 교육·이동·고용을 규제하는 법안들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가브리엘(Gabriel Prosser)이라는 인물이 이끈 노예 반란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으로, 가브리엘의 추종자였던 노예 26명이 교수형에 처해지는 등 강경한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1803년부터는 제퍼슨 행정부 아래에서 1807년까지 영국 주재 공사로 재직했습니다. 이후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매디슨의 임기가 끝난 뒤 미국의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
먼로의 임기(1817~1825)는 세계가 크게 움직이던 시기였습니다. 나폴론 패배 이후 유럽은 빈 체제를 바탕으로 반동주의로 기울었고,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남미와 중남미에서는 독립 운동의 기운이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독립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미국 역시 유럽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선언, 이른바 '먼로 독트린(먼로 선언)'을 발표합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이 원칙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선언한 것으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참전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개입이 늦었던 배경에 이 고립주의 원칙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유럽 전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을 자극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먼로 선언이 미국의 고립주의를 확립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획득하며 미국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 제임스 먼로
먼로를 '위대한 대통령'이라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전하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먼로는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대규모 플랜테이션(농장)의 소유주였으며, 토머스 제퍼슨 등과 달리 흑인 노예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한 것으로 유명하고, 그 위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먼로의 대통령 임기는 1817년부터 1825년까지로, 이 시기에 유명한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 성립됩니다.
당시 미국은 22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였습니다.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가 11개,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가 11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미주리 준주가 주로 승격되면서 이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미주리가 주로 승격되면 노예주가 우위에 서게 되므로, 연방 의회는 이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의 타협 끝에 미주리는 노예주로 승격되었고, 미국 내 노예제 찬성 세력이 다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주리 타협은 훗날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로 이어지고, 다시 미국 전역을 전장으로 만든 남북전쟁으로 치닫는 미국사의 큰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먼로가 차별한 것은 흑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흑인보다 더 심하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박해했습니다. 원주민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한 장본인이며, 플로리다에서 자행된 무차별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제임스 먼로는 백인 우월주의적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그가 원주민을 상대로 취한 일련의 정책은 '민족청소(ethnic cleansing)'라 불릴 만한 역사적 범죄입니다.
178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프랑스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벌어진 거의 모든 전쟁은, 백인이 인디언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는 지금도 미국의 어두운 역사로 남아 있으며, 그야말로 미국의 '진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 권력자조차 이런 모습이었다는 것에서, 당시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을 얼마나 관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노예 해방을 외친 에이브러햄 링컨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인물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로는 1831년 7월 4일, 미국 건국 55주년이 되는 날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기념일에 생을 마감한 것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에 이어 세 번째였습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빚을 지고 있었고, 결국 자신의 플랜테이션을 처분해야 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처럼, 미국 대통령들은 임기를 마친 뒤 재임 전보다 형편이 나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가난해졌다는 것과 닮았습니다. 내용이 어떻든,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강한 애국심과 책임감이 요구되며, 몸을 던지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자리라는 뜻이겠지요.
제임스 먼로에 대한 개인적 평가
먼로의 인종차별주의적 면모 때문에 개인적인 호감을 표하기는 어렵지만, 미국과 아메리카 대륙의 기본 틀을 만든 업적 자체는 분명히 평가해야 합니다.
그는 강대국 미국의 토대를 놓은 인물이며, 먼로 집권기에 미국의 인구가 크게 증가한 것도 사실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먼로는 '미국의 기반을 다진 대통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