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토머스 제퍼슨 – 노예 해방 조항을 독립선언문에 담으려 했던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 노예 해방 조항을 독립선언문에 담으려 했던 미국 제3대 대통령

미국 러시모어 기념 국립공원에는 거대한 석상으로 새겨진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이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꼽히는 네 사람을 본떠 만든 것으로, 왼쪽부터 차례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미국 건국의 핵심 문서를 집필하고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역대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

존 F. 케네디는 한때 백악관 만찬에 노벨상 수상자 49명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백악관에 모인 인재와 지식의 정점입니다. 다만, 토머스 제퍼슨이 홀로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던 때만은 예외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대농장주의 세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이미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할 만큼 총명한 소년이었는데요. 열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두 형제마저 요절하면서, 토머스는 아버지에게서 넓은 토지와 노예 열 명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는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언어뿐 아니라 역사, 철학, 수학을 비롯한 각종 과학까지 폭넓게 익혔고,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으며 호메로스 같은 고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특히 흑인을 변호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몬티첼로'라 불리는 저택을 손수 설계해 지었는데, 이 저택은 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됩니다.

토머스 제퍼슨 – 노예 해방 조항을 독립선언문에 담으려 했던 미국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이 저택을 짓기 위해 막대한 빚을 냈고, 수많은 노예들이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의 노예들 가운데 일부는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어느 정도의 자유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 업무 외에도 토머스는 버지니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우표법(인지세법) 등 영국 본국의 각종 법안에 반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는 반대 운동이 무력이 아닌 식민지 회의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식민지 문제를 오직 영국 의회에서만 결정하는 것에 반대한 이 입장이, 훗날 '대표 없는 과세 없다'는 유명한 구호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퍼슨 본인은 처음부터 독립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나,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의 전투가 일어나면서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됩니다.

토머스는 버지니아 대표로 대륙회의에 참석해 영국 국왕에게 보내는 중요한 문서 작성에 관여했고, 존 애덤스·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미국 독립선언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버지니아 권리선언과 버지니아 헌법을 작성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미국 독립선언문과 미국 헌법으로 완성되었고, 1776년 7월 4일 마침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초안의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습니다. 제퍼슨이 끝까지 넣고자 했던 노예제 금지 조항이 뺏긴 것인데, 이 부분은 훗날까지 미국 사회에 칼처럼 남게 됩니다.

특히 이 무렵부터 존 애덤스와의 관계가 형성되었고, 두 사람은 1812년 화해하기까지 오랜 갈등을 빚었습니다.

독립 이후의 행보

독립 이후 토머스는 미국 법체계 정비에 몰두했습니다. 종교의 자유처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조항들이 바로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넣고 싶어 했던 노예제 금지 조항은 미국 특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토머스는 노예 수입 금지 법안 통과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듭한 토머스였지만, 고향이 영국군에 점령당했을 때 피신한 일화 때문에 '적 앞에서 도망친 대통령'으로 조롱받기도 했습니다. 군인 출신의 조지 워싱턴과 달리 토머스 제퍼슨은 순수한 문관이었던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 – 노예 해방 조항을 독립선언문에 담으려 했던 미국 제3대 대통령

1785년에는 주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어 1789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고,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자 국무장관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미국 정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확립합니다.

결국 조지 워싱턴이 3선을 사양하자 존 애덤스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토머스는 부통령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800년, 드디어 제3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제퍼슨은 국내 세금을 줄이고 관세 수입을 늘리는 것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이는 2019년 기준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했던 정책과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토머스의 임기 중 미국은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트리폴리와 '바르바리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을 치렀고, 토머스 스스로 지휘해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설립하고, 나폴레옹 1세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영토를 단숨에 크게 확장했습니다.

또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만큼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버지니아 대학교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

이토록 폭넓은 활동을 펼쳤던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50주년이 되는 날, 1826년 7월 4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기하게도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도 같은 날 생을 마감했으며, 토머스 제퍼슨이 조금 더 먼저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향년 83세였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졌지만, 사실 그의 유산은 사후에 막대한 빚임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평가

그는 근면하기로 유명한 인물로, 말년에도 코란을 읽을 정도로 학구열이 왕성했습니다.

부유한 계층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노예 해방을 추진한 그는 미국의 양심이라 불릴 만하며, 앞으로도 미국 역대 최고의 대통령을 꼽을 때 언제나 이름이 오르내릴 인물입니다.

다만 미국 대통령을 평가할 때는 노예제 문제를 함께 짚어야 합니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진정으로 해결됐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상처를 미국 사회에 남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찬반의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지만, 역대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이라 평가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