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사람들은 도덕적인 이유로 노예 제도에 점점 더 반대하는 반면, 남부 사람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노예 제도를 옹호했습니다. 이 갈등은 서부 확장과 북부와 남부 간의 세력 균형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820년 미주리 타협은 미주리주를 노예 주로, 메인주를 자유 주로 인정함으로써 노예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지연시킬 뿐이었습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북부에서는 노예폐지 운동이 더욱 거세졌고, 북부와 남부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인해 서부에 새로운 영토가 획득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예제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남부 사람들은 노예 제도를 새로운 영토로 확장하기를 원했지만 북부 사람들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은 미주리 타협을 폐지하고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주민들이 노예 제도를 허용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블리딩 캔자스(Bleeding Kansas)'라고 알려진 유혈 충돌이 발생했고, 남북한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860년, 노예제도 확대에 반대한 공화당원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부 여러 주가 분리되고 1861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남북 전쟁은 주로 노예 제도 문제를 놓고 벌어졌고, 1865년 노예 제도가 폐지되고 연방의 승리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