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의 역사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남부 연합과 조약을 체결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평화 조약'이라 부를 만한 문서는 없었습니다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남부 연합과 평화 조약을 맺었는가?"라는 질문이 종종 제기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된 '평화 조약'이 남부 연합(미국 남부동맹)과 원주민 국가 사이에 존재했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남북전쟁 기간 동안 여러 부족이 남부 연합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맺은 사실 자체는 분명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1861년, 남부 연합과 조약을 맺은 다섯 부족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부 연합은 인디언 준주(오늘날 오클라호마 지역)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나섰습니다. 남부 연합의 대표 앨버트 파이크(Albert Pike)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라 불린 다음 부족들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 체로키(Cherokee) – 1861년 10월, 스탠드 와티(Stand Watie)가 이끄는 친남부파를 중심으로 조약 체결
  • 초토(Choctaw) – 1861년 7월, 가장 먼저 남부 연합 지지를 공식화
  • 칙사우(Chickasaw) – 1861년 7월, 초토와 함께 조약 체결
  • 크리크(Creek, 무스코기) – 1861년 7월 조약 체결, 부족 내부는 심하게 분열
  • 세미놀(Seminole) – 1861년 8월 조약 체결

이 밖에도 오세이지, 퀘이포, 세네카, 쇼니 등 소규모 부족들과도 유사한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대등한 합의가 아니라 강압과 생존의 선택

이 조약들은 양측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부 연합은 군사적 보호와 의회 대표권 같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지만, 그 이면에는 부족들의 절박한 처지가 있었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미국 연방 정부와 백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강제 이주를 겪어온 부족들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쪽 편에 서거나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확보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었습니다.

실제로 각 부족 내부도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체로키의 존 로스(John Ross) 추장은 처음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친남부파인 스탠드 와티 세력에 밀려 결국 조약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크리크족의 오스틀러야홀라(Opothleyahola)는 북부를 지지하며 부족원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피난했으나, 남부 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행군을 겪었습니다. 이 비극은 '얼음 위의 피의 행렬(Trail of Blood on Ice)'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부 연합의 폭력과 약속 파기

더 나아가 남부 연합은 영토 확장과 군수품 확보 과정에서 원주민 사회에 대한 무력 행사와 약속 파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약으로 보호를 약속받았던 부족들의 가축과 물자는 남부군에 징발되었고, 약속된 연금과 보급품은 제때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연방(북부)을 지지하던 원주민 마을들은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조약은 상호 신뢰에 기반한 평화의 약속이 아니라, 남부 연합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좌우되는 종이 문서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된 대가

패전 이후 부족들은 또다시 대가를 치렀습니다. 미국 연방 정부는 남부 연합과 조약을 맺은 것을 빌미로 재건 시대에 '징벌적 조약'을 강요했고, 인디언 준주 서부 절반의 할양과 부족 내 흑인들에 대한 권리 부여 등 까다로운 조건이 부과되었습니다. 남부 연합과의 동맹은 부족들에게 영토 축소라는 결과만 남긴 셈입니다.

정리

요컨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 남부 연합 사이에 '평화 조약'으로 부를 만한 문서는 없었지만, 체로키·초토·칙사우·크리크·세미놀을 비롯한 여러 부족이 1861년 남부 연합과 동맹 조약을 맺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단에 가까웠고, 남부 연합 역시 원주민을 대등한 주권자로 대우하지 않은 채 폭력과 약속 파기로 일관했습니다. 남북전쟁기 원주민의 역사는 협력이 아니라 분열과 강압, 그리고 희생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