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승계한 두 번째 대통령, 일본에 페리 함대를 파견한 대통령, 그리고 역사상 한 번도 인기를 끌지 못했던 대통령. 바로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입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태어난 대통령
서양 역사를 동양 역사와 비교해 보면, 백지 상태에서 출발해 일대걸웅이 된 인물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고대 로마 황제 중 가난한 농부 출신이 있긴 했지만, 서양 전체를 통틀어 극심한 빈곤에서 군주나 국가 원수로 올라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밀러드 필모어는 바로 그 드문 예외 중 하나입니다.
필모어는 뉴욕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어색해질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14세 때 견습공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판사 밑에서 서기로 일하며 법률 공부를 시작했고, 변호사 사무실로 옮겨 다시 법을 공부한 끝에 마침내 독립했습니다. 당시 그가 설립한 법률사무소는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설립한 사무소는 공동 소유였는데, 훗날 함께 일했던 파트너 네이선 켈시 홀(Nathan Kelsey Hall)은 필모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우정청장으로 발탁됩니다.
필모어는 1828년 뉴욕 주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했고, 1832년에는 휘그당 소속으로 연방 하원 의원에 진출했습니다. 1848년 휘그당의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필모어는 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노예제 관련 이슈에서 표를 얻기 위해 자유주(노예제 금지 주) 출신인 필모어를 부통령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필모어 자신은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내전을 피하기 위해 노예제 유지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필모어가 인기를 얻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필모어 역시 노예제 자체는 언젠가 사라져야 할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국가 분열을 막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스스로 흑인 노예를 부리던 테일러는 오히려 노예제 연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850년 테일러가 병으로 사망하자, 필모어는 미국 제13대 대통령으로 승계했습니다.
미국 제13대 대통령으로서의 시절

필모어 재임 기간인 1850년, 이른바 '1850년 타협'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는 도망 노예 단속법 등 노예제를 강화하는 일련의 법안들이 통과된 것을 의미하며, 앞서 언급했듯이 필모어 자신도 노예제 유지를 지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강경한 정책을 펼쳐 토지 할양을 강요했고, 원주민과의 대립 구도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 시기 미국은 대확장기였습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이 시작되었고, 극동으로 페리가 파견되었으며, 하와이 왕국 역시 그 영향권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후세에 평가할 만한 뚜렷한 업적은 거의 남기지 못했습니다. 필모어가 퇴임한 후에는 원주민과의 전쟁이 격화되었고, 그가 속했던 휘그당은 몰락해 해체되었으며,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지더니 결국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비록 대통령 재임 중의 업적은 아니지만, 그의 유일한 실적으로 꼽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딴 버펄로 대학교(University at Buffalo) 설립에 기여한 일입니다.
밀러드 필모어는 187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남북전쟁 기간에도 그는 노예제에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줄곧 반대했습니다.
왜 인기가 없는지 충분히 납득되는 대통령입니다.
밀러드 필모어에 대한 평가
결론적으로, 그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도 없으면서, 노예제 확대라는 시대 역행의 정책을 지지하며 이미 혼란스럽던 나라를 더욱 어지럽혔습니다. 돋보이는 점이 전혀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