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중 호주와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가장 긴밀하게 협력한 동맹국이었다. 호주는 미국이 태평양에서 확보한 가장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였으며, 양국은 일본 제국에 맞서 나란히 전장에 섰다. 다만 이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 내내 강고한 협력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지휘권과 자원 배분을 둘러싼 긴장도 존재했다.
미국으로 눈을 돌린 호주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과 일본의 남방 침공, 그리고 1942년 2월 싱가포르의 함락은 호주의 안보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존 커틴 호주 총리는 "호주는 미국을 바라본다"고 선언하며, 전통적인 모국인 영국 대신 미국과의 동맹으로 국가 전략의 축을 옮겼다.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난 뒤 호주를 태평양 전역의 지휘 기지로 삼았고, 멜버른과 브리즈번에는 연합군 사령부가 자리 잡으며 수십만 명의 미군이 호주에 주둔했다.
함께 싸운 전장들
양국 군대는 수많은 전역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에서는 미·호 연합 해군이 일본 함대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했는데, 이는 일본의 남태평양 공세가 처음으로 좌절한 사례로 평가된다. 같은 해 코코다 트레일 전투와 밀네만 전투에서는 호주군이 일본 육군의 진격을 막아냈고, 미군이 지상 및 항공 지원에 나섰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호주 정보 당국이 제공한 암호 해독 성과가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뉴기니 전역과 필리핀 탈환 작전에서도 양국 병력이 함께 참전하며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미국의 군사·경제 지원
미국은 호주에 막대한 자금과 군사 물자를 지원했다. 미국산 선박, 항공기, 무기와 각종 장비가 호주군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호주를 거점으로 삼은 미군의 대규모 주둔은 현지 경제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동맹 아래의 긴장
그럼에도 양국 관계에 균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주 지도층은 때때로 미군 지휘부의 오만함과 소홀함에 좌절감을 느꼈다. 호주는 전쟁 수행에 자신들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지휘부는 종종 호주군을 미군에 종속된 보조 전력으로 취급했고, 호주 지상군 사령관 토머스 블레이미와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 호주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는 현실은 호주 사회에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을 낳았으며, 1942년 11월 브리즈번에서는 양국 병사 간의 갈등이 폭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전쟁이 남긴 유산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호주와 미국의 관계는 전쟁 내내 강고하게 유지되었다. 일본을 격퇴한다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 두 나라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 협력은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터에서 다져진 유대는 1951년 호주·뉴질랜드·미국 안보 조약(ANZUS) 체결로 공식화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양국 우호 관계의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