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가 기억하는 '아마우타'
매년 6월 14일은 페루 출신 지식인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José Carlos Mariátegui)의 탄생 기념일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인정받은 그는 20세기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아마우타(Amauta)'라 불리는 그의 사상은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작된 삶
마리아테기는 1894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마리아테기 레케호와 마리아 아말리아 라 치라 바예호스의 아들로, 모케과의 검소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899년 가족과 함께 리마 북부의 우아초로 이주했지만, 이곳에서 겪은 사고로 관절 강직증을 앓게 되어 평생 그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고는 독서와 학문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15세에 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저널리스트로 성장했습니다.
대중을 위해 쓴 사상가
언론 활동을 통해 그는 전설적인 잡지 <콜로니다(Colónida)>에 글을 기고하며 아브라함 발델로마르와 친분을 쌓았고, 시집 한 권까지 집필했지만 결국 출간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1918년 극적으로 변모합니다. 마누엘 곤살레스 프라다의 영향을 받아 대학 개혁과 노동자 투쟁 같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세사르 발레요,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 라울 포라스 바레네체아, 루이스 알베르토 산체스 등 당대 인물들과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유럽 유학, 사상의 완성
1919년, 아우구스토 B. 레구이아 정부는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마리아테기를 국외로 내보내기 위한 방편으로 유럽 유학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를 공부하며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완성했고,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아나 키아페와 결혼했습니다. 이탈리아 외에도 프랑스,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사상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지적 훈련을 마친 이탈리아 시절의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페루 현실 해석을 위한 7개의 수필'과 사회당 창당
1923년 페루로 돌아온 그는 특히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가 멕시코로 망명한 뒤(아야 데 라 토레는 1924년 멕시코에서 아프라(APRA)를 창당) 페루 정치에서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24년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은 후에도 1925년 출판사 미네르바(Editorial Minerva)를 설립했고, 1926년에는 당대 지식인들을 한데 모으고 예술·문학계의 원주민주의 흐름을 꽃피운 잡지 <아마우타(Amauta)>를 창간했습니다.
1927년에는 그의 대표작 『페루 현실 해석을 위한 7개의 수필』을 출간하여 페루의 경제, 역사, 문학의 변천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했습니다. 1928년에는 아야 데 라 토레와 결별하고 페루 사회당을 창당했으며, 1929년에는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오는 총노동조합연맹(CGTP)을 설립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자녀들과 함께한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다리 절단 수술 후 레세르바 공원에서의 모습
너무 이른 죽음
저술 활동의 성공으로 1929년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공산당 회의에 초청받았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자신의 입장을 담은 대표단만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이념적 차이로 인해 대륙의 다른 좌파 정당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마리아테기는 페루를 위한 모델에 대해 "흉내도 모방도 없다(Ni calco ni copia)"라고 선언했듯, 다른 나라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페루만의 고유한 길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1930년 4월 16일, 병 치료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직전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페루의 여러 대통령과 영웅들이 잠든 프레스비테로 마에스트로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그가 세운 사회당은 이름을 공산당으로 변경했습니다.

프레스비테로 마에스트로 묘지에 있는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의 무덤. 묘비명에 새겨진 찬사 외에도 그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마르크스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