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안데스 세계의 가장 중요한 증언자
펠리페 과만 포마 데 아얄라(Felipe Guamán Poma de Ayala)의 저서 『새 연대기와 선한 정부(Nueva coronica y Buen Gobierno)』는 저자가 의도한 목적을 당대에는 이루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식민지 시대 사람들의 삶과 관습을 기록한 가장 중요한 그래픽 문서로 자리 잡았다. 1594년부터 1614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쓰인 이 방대한 저작은 800쪽에 달하는 본문과 400여 컷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페인어에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가 섞여 있어 1973년이 되어서야 그 진가가 온전히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안데스 세계의 주인, 인디언의 수난
"페루에서 유럽으로 간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일하는 인디언들의 피와 땀이다." 한 총독의 회고록에 담긴 이 말은 식민지 착취의 본질을 꿰뚫는다. 과만 포마는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폐하만이 그들의 왕이자 자연스러운 주군으로서 안데스 사람들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비참함과 재난, 부당한 대우와 형편없는 임금을 애도하소서. 그들은 기니에서 온 노예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노예들은 몸값을 치렀기에라도 더 나은 대우를 받기 때문입니다."
당대에도 '티로스인과 트로이아인'이라 불리던 양측 모두 인디언에 대한 야만적 착취를 인식하고 있었다.
"인디언은 가장 완전한 노예 신분으로 늘 신음했다"
역사가 G. 레기아 이 마르티네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군주들이 진정한 기독교적 인도주의로 천 가지 칙령을 내렸음에도, 불행한 인디언들은 가장 완전한 노예 상태에서 늘 신음했다. 시의회가 교대 근무를 배정하고,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되었으며, 심지어 이웃에게 예르바 마테, 물, 장작 등 일상 필수품을 강제로 공급하게 했다. [...] 총독령의 모든 주에서 강제로 차출된 엄청난 수의 불행한 이들이 집과 땅을 떠나 친척들을 버려둔 채, 도시의 공동 노동이나 광산 착취에 동원되었다."
식민지 시대 인디언의 계층과 비참한 처지
식민지 시기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은 집단으로 분화되었다.
- 레두시온(축소촌) 인디언: 인디언 공화국의 정식 구성원. 세금 납부와 코레히도르(지방관)의 상품 강매 의무, 농산물의 5%에 해당하는 '베인테(veinte)'를 교회에 바쳐야 했다.
- 야나코나(Yanacona) 인디언: 스페인인의 광대한 토지에서 일하는 농노. 정복자들과 그 후손에게 토지 분배 과정에서 넘겨졌으며,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시작한 제도다.
- 미타요(Mitayo) 인디언: 광산 노동에 징집된 인디언. 도로·다리 건설·보수, 목장 관리, 공공사업, 스페인인과 크리올로의 비옥한 토지 강제 노동에도 동원되었다.
- 인디언 노무자: 석공, 벽돌공, 목수, 자물쇠공 등 전문 기술을 가진 '자유' 임시 노동자.
잉카 귀족 출신, 식민지 권력에 맞선 쿠라카
과만 포마 데 아얄라(1532?~1614?)의 출신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야쿠초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쿠라카(curaca), 즉 토지 소유자이자 스페인 관리들의 협력자, 인디언과 스페인어 통역관을 겸한 타우안틴수유 귀족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권리를 박탈당한 그는 평생 '존중받기 위한' 평화적 투쟁을 벌였다. 대다수 인디언이 스페인 당국, 더 나아가 스페인 국왕에게 호소하며 구원을 기다리던 전형적인 사례다.
30년간의 방랑, 그리고 왕에게 올린 최후의 탄원
그는 30년간 총독령 곳곳을 누비며 가난 속에서 언어와 글을 익히고, 의사와 무지한 자, 지식인 모두를 섬겼으며, 총독·판사·주교·코레히도르·엔코미엔데로 등과 교류했다. 성직 방문관과 조세 인디언 방문관, 토지 구성 방문관으로 일하며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권력자들의 오만을 직접 목격했다.
80세 노구가 된 1614년, 고향 루카나스(아야쿠초)로 돌아온 그는 집과 토지를 빼앗긴 사실을 알게 된다. 지방 당국에 호소했으나, 코레히도르와 본당 신부의 공모로 오히려 공화국에서 추방당한다. 이것이 그의 분노를 폭발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포토시의 한 스페인 관리의 권유로 그는 카스티야 궁정(스페인)으로 건너가, 유명한 『새 연대기와 선한 정부』를 국왕에게 제출했다. 당대에는 소용없었으나, 만화적 삽화와 생생한 인물 묘사로 식민지 현실을 고발한 이 문서는 후대에 빛을 보게 된다.
"뒤집힌 세계"를 바로잡고자 한 유토피아
과만 포마는 자신이 사는 식민지 세계를 "뒤집힌 세계(mundo al revés)"라 불렀다. 나단 바흐텔(Nathan Wachtel)의 분석처럼, 그는 전통적 안데스 가치가 무너지고, 정복자들이 가져온 기독교와 왕실 법률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는 혼돈을 목격했다. 그는 사회를 정의로운 질서로 되돌리고, 식민 지배를 철폐하려 했다. 그 유토피아적 열망은 반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잉카에 대한 비판적 시선, 그리고 "약이 없다"는 체념
흥미롭게도 그는 잉카를 긍정하지 않았다. 만코 카파크가 여동생과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잉카 귀족의 근친상간을 고발하며, 그들을 잔혹하고 부정한 지배자로 묘사한다. 저서 후반부에서는 마을의 축제와 풍속을 기록하면서도, "스페인인의 횡포, 인디언의 나태와 우상 숭배, 카시케의 탐욕, 성직자의 색욕"을 신랄히 비판하며 "이 상황에 약은 없다"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국왕과 일부 식민 관료를 칭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혈통 카시케에 의한 '선한 정부'를 꿈꾸다
과만 포마는 인종주의적 귀족주의자였다. 그는 문제의 원인이 카스트(신분)의 혼란, 메스티소와 물라토의 증가, 아이유(공동체)의 파괴, 평민 인디언의 카시카고(추장직) 찬탈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통 혈통의 카시케에게 정부를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 페루의 통치자이자 감독관을 자임하며 스페인 당국과 맞섰다. "나도 인간으로서, 새들의 왕으로서 더 높이 날고 더 가치 있다"는 말로 자신의 존엄을 주장했다. 목표는 이루지 못했으나, 인디언 공화국 대다수 주민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국왕 직소(直訴)를 성사시켰다.
저자 논쟁: 과만 포마는 실존 인물인가?
최근 이탈리아 문서고에서 아넬리오 올리바(Anelio Oliva)의 서명 문서가 발견되며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수회 신부 블라스 발레라(Blas Valera)와 올리바가 공모해 과만 포마라는 가명을 사용해 연대기를 쓰고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다는 것이다. 발레라가 소속 수도회의 금령으로 저술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설의 진위는 아직 검증 중이나, 설령 사실이라 해도 작품의 역사적·문학적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
동시대 원주민 연대기 작가들
과만 포마 외에도 다음과 같은 원주민 연대기 작가들이 있었다.
- 티투 쿠시 유판키(Titu Cusi Yupanqui): 빌카밤바의 제3대 잉카, 만코 잉카의 아들. 1570년 스페인 신부에게 구전으로 원주민 저항사를 구술했다.
- 후안 산타 크루스 파차쿠티 얌피 살카마유과(Juan Santa Cruz Pachacuti Yamqui Salcamayhua): 『이 피루 왕국의 고고학 목록(Relación de antigüedades deste reyno del Pirú)』 저자. 18세기 초 작성되었으며, 세계 창조부터 피사로의 정복까지 안데스 역사를 다루고 다수의 전통을 삽입해 고대 안데스 문화생활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다.
코펜하겐에서 잠든 보물, 20세기의 재발견
『새 연대기와 선한 정부』는 1908년 리하르트 피에트슈만(Richard Pietschmann)에 의해 덴마크 코펜하겐 왕립도서관에서 발견되었고, 1936년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이후 인디언 공화국과 코레히미엔토(지방 행정구)에서 벌어진 식민지 통치의 수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결정적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400여 컷의 삽화는 단순한 삽입화를 넘어, 당대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표정·자세·도구·의복까지 생생히 포착한 시각 민족지적 기록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
글: 훌리오 비야누에바 소토마요르(Julio Villanueva Sotomayor) / 전기 "펠리페 과만 포마 데 아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