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아프리카 항해기(페리플러스): 15세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연안 탐험

아프리카 항해기란 무엇인가?

아프리카 항해기(African Periplus)는 15세기 포르투갈이 수행한 일련의 항해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초기에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무엇보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탐사로 유명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인도로 가는 대체 항로를 개척하여, 제노바나 베네치아 상인을 통해 물건을 사들여야 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동방의 상품을 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 항해의 배경과 주요 인물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인파치 도웅 엔히크(1394~1460), 이른바 '항공왕 엔히크'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에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는 사그레스에 항해 학교를 설립하고 수많은 탐사 항해에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아프리카 항해를 이끈 대표적인 항해사로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0~1500), 바스쿠 다 가마(1469~1524), 디오구 카옹(1440~1486), 질 이아느스(15세기), 페루 다 코빌량(1450~1530) 등이 있습니다.

항해를 통해 도달한 주요 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우타 (1415)
  • 마데이라 (1419)
  • 아조레스 제도 (1431)
  • 보자도르 곶 (1434)
  • 황금강·리우데오로 (1436)
  • 블랑쿠 곶 (1441)
  • 베르데 곶 (1445)
  • 미나·엘미나 (1475)
  • 콩고 (1482)
  • 상투메 (1484)
  • 폭풍의 곶 (1487)
  • 모잠비크 (1498)
  • 몸바사 (1498)
  • 말린디 (1498)
  • 아센션 섬 (1501)
  • 세인트헬레나 섬 (1502)
아프리카 항해기(페리플러스): 15세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연안 탐험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상관(fábrica)'이라 불리는 거점을 설립했습니다. 이는 해안가에 요새를 건축한 무역 기지를 의미합니다.

상관에는 왕실 대표들이 상주하며, 현지 원주민들과 지역 특산품의 교역을 전담했습니다.

이 시기 포르투갈의 관심사는 오직 토지 장악과 상품 유통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통한 개척은 아직 계획 단계가 아니었고, 포르투갈 왕실 역시 인구를 이주·정착시킬 의도는 없었습니다.

보자도르 곶 돌파

보자도르 곶(Cabo do Bojador)은 오랫동안 넘기 어려운 한계선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돌파하는 것이 새로운 땅을 찾으려던 모든 항해사들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1434년 질 이아느스의 탐사에서 선단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멀어지는, 당시에는 극도로 두려워하던 항법을 과감히 선택했습니다. 이후 다시 해안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면서 보자도르 곶을 돌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 해역이 충분히 항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왕실 독점과 노예 무역

1460년경부터 세네갈에서 시에라리온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노예 무역이 이미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해는 인파치 도웅 엔히크가 서거한 해였지만, 항해 사업은 왕실의 지원 아래 계속 이어졌습니다. 1462년에는 페드루 신트라가 기니에서 금을 발견하며 새로운 부의 원천이 열렸습니다.

1481년 즉위한 주앙 2세 국왕(1455~1495)은 포르투갈 왕실이 식민지의 재화를 독점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이른바 '왕실 독점'은 단순한 착취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고정된 정착지가 유지되고 현지 생산이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폭풍의 곶, 아니면 희망봉?

아프리카 항해기(페리플러스): 15세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연안 탐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항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1488년, 베테랑 항해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격렬한 폭풍을 헤치고 '폭풍의 곶(Cabo das Tormentas)'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이 곶은 '희망봉(Cape of Good Hop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항해사 바스쿠 다 가마는 1497년부터 1498년 사이에 이곳을 통과해 인도에 도달했으며, 칼리컷에 상륙하여 현지 지도자들과 상품 거래 및 통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는 6,000%가 넘는 수익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상인들이 인도산 상품의 구매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항로를 확보한 포르투갈이 엄청난 이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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