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순환기(Gold Cycle)는 브라질 식민지 시대에 금의 채굴과 수출이 주요 경제 활동으로 자리 잡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는 17세기 말, 카리브해 지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설탕 생산이 경쟁력을 갖추면서 브라질 북동부의 설탕 수출이 침체에 빠진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황금 순환기 요약
금 채굴은 브라질 영토 점유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포르투갈 본토와 북동부 연안에서 광산 지역으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났으며, 원주민과 아프리카인에 대한 노예화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포르투갈 왕실은 금속의 채굴과 운송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세금을 부과했고, 브라질의 수도를 살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겼습니다.
1750년부터 1770년 사이 포르투갈은 잘못된 경영과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기에 산업화를 진행하며 소비 시장과 세계 패권을 공고히 하려던 영국의 압박까지 더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자, 포르투갈인들에게 부와 경제적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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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스제라이스의 황금 순환기
미나스제라이스, 고이아스, 마투그로수에서 발견된 금광상은 '미나(mine)'라 불리는 채굴 구획으로 나뉘었습니다.
18세기 전성기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으며, 한 세기 동안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의 축적은 교양 있는 엘리트층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금광 개척자들의 자녀 중 상당수는 코임브라 대학교에 진학하여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경제 역시 더욱 역동적으로 변했습니다. 광산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농업 교역이 광산 주변에서 활발해졌고, 소규모 제조업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조업은 1785년 금지령에 따라 억제되었습니다.
금 채굴은 식민지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산 지역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식민지 수도가 살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전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35톤의 금이 채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가 빼돌려졌음을 고려하면 실제 채굴량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황금 순환기는 18세기 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가운데 광산이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금의 채굴과 관리
이 시기는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했던 시기였습니다. 왕실은 채굴된 광석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금은 카사스 데 푼디상(Casas de Fundição), 즉 제련소에서 주조되고 과세되었으며, 이곳에서 세금 납부를 증명하는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탈세 행위가 끊이지 않았고, 적발될 경우 무거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주요 통제 장치
- 퀸토(Quinto, 5분의 1세): 금 생산량의 20%를 포르투갈 국왕에게 바치는 세금
- 데하마(Derrama, 할납세): 식민지가 매년 약 1,500kg의 금을 납부해야 하는 할당량으로, 미달 시 광산 소유주들의 재산이 담보로 잡힘
- 인두세(Capitação): 광산 소유주가 자신의 광구에서 일하는 노예 1인당 내야 했던 세금
높은 세금과 각종 부담, 가혹한 처벌,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이 현지 주민에게 가한 정치적 폭압은 결국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번지는 갈등을 낳았습니다.
이 경제가 인구 증가를 가져온 동시에, 광산에서 얻은 이윤이 생산적인 활동에 재투자되지 않으면서 빈곤과 불평등도 함께 만들어냈습니다.
이 시기가 끝난 후 브라질은 단순한 1차 산품 수출국으로 남았고, 경제 발전을 이끌 기술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이 악순환 속에 머물렀습니다.
갈등과 저항
황금 러시, 무거운 세금 부담, 포르투갈 정치권의 폭압은 엠보아바 전쟁(1707~1709)과 같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갈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이나스피덴시아 미네이라(Inconfidência Mineira)', 즉 미나스 음모 사건입니다.
황금 순환기의 결과
황금 순환기는 브라질, 포르투갈, 영국 모두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브라질에게 이 시기는 경제의 축이 북동부 연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고, 수도가 살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엘리트층이 부유해지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계몽주의가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에는 이 운동에 관한 책들을 들여와 여러 사람들이 읽었습니다.
노예들에게 금은 자유의 희망을 안겨주었고, 해방 노예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마프라 궁전(Palácio de Mafra)과 같은 건축물이 가능해졌는데, 이 복합 건물에는 교회, 궁전, 수도원, 채소밭, 사냥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투엔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연결되어 있던 영국에게는, 브라질의 금이 영국제 공산품 대금을 지불하는 재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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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미나스 금광. 그래픽: 18세기 금 생산량과 광산 인구. FGV 아틀라스. 2020년 11월 20일 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