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디나 황후, 누구인가?
레오폴디나 황후(Dona Leopoldina)는 오스트리아 대공녀로 태어나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공주이기도 했던 인물로, 페드루 1세(Dom Pedro I)의 첫 번째 아내이자 브라질 독립을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페드루와의 결혼을 통해 브라질 최초의 황후가 되었으며, 두 달 동안 포르투갈의 여왕이기도 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깊은 열정을 지녔던 그녀는 브라질의 동식물을 연구할 여러 오스트리아 과학자들을 브라질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페드루 1세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두 명은 군주가 되었습니다. 바로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Dona Maria II)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Dom Pedro II)입니다.
출생, 이름, 유년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카롤리나 요제파 레오폴디나(Carolina Josefa Leopoldina)는 1797년 1월 22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두 번째 아내인 나폴리·시칠리아 왕녀 마리아 테레사 카롤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자녀였습니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그녀는 '마리아 레오폴디나'로 서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왕족 여성의 이름에 '마리아'를 넣는 포르투갈 왕실의 전통 때문입니다. 역사서에는 '레오폴디나 황후', '도나 레오폴디나', '도나 마리아 레오폴디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나'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빈 궁정에서 정성껏 교육받은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식물학과 광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야외 탐사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물과 식물 표본을 수집했습니다.
또한 언어, 역사, 회화를 공부하여 여러 점의 수채화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화가 요제프 크로이칭거(Joseph Kreutzinger)가 그린 도나 레오폴디나의 초상화
역사적 배경
유럽 궁정 간의 혼인은 정치적 동맹의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국가 간의 가교 역할을 하며 평화를 보장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나 레오폴디나의 유년기는 유럽 전역으로 프랑스 제국을 확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상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두 제국의 관계를 가깝게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는 장녀 마리아 루이사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나폴레옹의 요구에 따라 프란츠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황제만을 칭해야 했습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결혼은 국가 영토 보전을 위한 '필요악'으로 여겨졌습니다.
레오폴디나와 페드루의 결혼
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최종적으로 패배하자 유럽 열강은 빈 회의에 모여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습니다.
파리 주재 포르투갈 대사였던 마리알바 후작은 프랑스로부터 배상금과 보상을 요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또한 주앙 6세(Dom João VI)로부터 왕세자 페드루의 배우자를 물색하라는 밀명도 받았습니다.
선택은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돌아갔고, 결혼식은 1817년 5월 13일 빈에서 대리 결혼 방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도나 레오폴디나는 5개월에 걸친 긴 항해 끝에 브라질로 향했습니다. 그녀의 일행에는 브라질 자연을 연구하고 그림으로 담아낼 오스트리아의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동행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카를 폰 마르티우스(Carl von Martius), 요한 폰 슈피스(Johann von Spix), 요한 나테러(Johann Natterer)가 있었습니다.
젊은 공주는 같은 해 11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남편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부부는 노사 세뇨라 두 카르모 성당(Nossa Senhora do Carmo)에서 축복식을 받았습니다.
레오폴디나와 페드루의 자녀들
페드루와 도나 레오폴디나 사이에서는 일곱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이중 네 명이 성인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마리아 2세(1819~1853):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양위하면서 1826년부터 1828년까지, 그리고 1834년부터 1853년까지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재위했습니다.
자누아리아(1822~1901): 페드루 2세에게 후손이 생길 때까지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습니다. 황후 테레자 크리스티나의 오빠인 아퀼라 백작 루이스와 결혼했습니다.
프란시스카 데 브라간사(1824~1898): 프란츠 페르디난트 공자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이 공주는 조카들인 이자벨과 레오폴디나가 각각 오를레앙 가문의 가스통 백작(다외 백작)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루이스 아우구스투와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페드루 2세(1825~1891): 브라질 왕위 계승자로 14세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부부의 다른 자녀로는 미겔, 주앙 카를루스, 파울라가 있습니다.
브라질 독립에 대한 기여
1820년 포르투 자유주의 혁명으로 인해 주앙 6세가 포르투갈로 떠나면서, 페드루는 브라질 섭정왕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두 영토를 분리하려는 세력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도나 레오폴디나가 남긴 편지들을 보면 그녀가 독립 운동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1822년 상파울루를 비롯한 일부 주들이 섭정왕자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페드루는 파울리스타(Paulistas)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직접 현지를 방문했고, 그동안 도나 레오폴디나가 임시 섭정직을 맡았습니다.
바로 그때 포르투갈에서 페드루에게 즉시 왕국으로 귀환하라는 요구의 서신이 도착합니다. 도나 레오폴디나는 조제 보니파시우(José Bonifácio)의 요청에 따라 국가평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이러한 태도가 브라질의 연합왕국 지위를 박탈하고 다시 식민지로 되돌리려는 술책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그녀는 1822년 9월 2일 브라질 독립 선언령에 서명했습니다. 이후 조제 보니파시우와 함께 페드루에게 서신을 보내, 이제 포르투갈과의 단절이 시대의 요구임을 알렸습니다.

도나 레오폴디나가 브라질 독립을 결정짓는 국가평의회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작가: 조르지나 드 알부케르키(Georgina de Albuquerque). [연도 미상]. 국립역사박물관, 리우데자네이루.
결혼 생활
초기에 부부는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페드루의 불륜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페드루 1세와 도미틸라 드 카스트루(Domitila de Castro, 산투스 후작 부인)의 관계였습니다. 페드루 1세는 이를 감추기는커녕 정부의 온 가족을 공식 관저인 상크리스토방 궁(Palácio de São Cristóvão) 근처에 머물게 했습니다.
반복되는 임신과 이러한 상황에서 오는 슬픔은 황후 레오폴디나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1826년 12월 11일 황후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으며, 장례 행렬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레오폴디나 황후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 독립 브라질의 첫 국기는 화가 장바티스트 드브레(Jean-Baptiste Debret)가 디자인했으며, 군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초록색은 브라간사(Bragança) 가문을, 노란색은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을 상징합니다.
- 1824년에 설립된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상레오폴두(São Leopoldo) 시는 도나 레오폴디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 1874년에 개통된 레오폴디나 철도(Estrada de Ferro Leopoldina)도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습니다.
- 리우데자네이루의 삼바 스쿨 임페라트리스 레오폴디넨스(Imperatriz Leopoldinense) 역시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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