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에르메스 다 폰세카: 브라질 제8대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에르메스 다 폰세카(Hermes Rodrigues da Fonseca, 1855~1923)는 브라질 남부 출신의 군인 겸 공화파 정치가로,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브라질을 통치했다.

그는 브라질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이며, 공화국 초대 대통령 데오도로 다 폰세카 원수의 조카였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 덕분에 그는 1889년 11월 15일 공화정 선포 당시 제2기마포병연대 지휘관 자격으로 선포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에르메스 다 폰세카: 브라질 제8대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생애와 군 경력

에르메스 호드리게스 다 폰세카는 1855년 5월 12일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상가브리엘에서 태어났다. 군인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헤르메스 에르네스투 다 폰세카 원수였고 어머니는 리타 호드리게스 바르보사였다.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871년, 불과 16세의 나이로 리우데자네이루에 들어가 문리 학문을 공부한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를 가르친 것은 실증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베냐민 콩스탕으로, 그의 실증주의적 신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78년에는 왕정 타도와 새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조직인 군인클럽(Círculo Militar) 소속 '공화 클럽'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같은 해 오르시나 프라치오니 다 폰세카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며, 첫 아내가 1912년 세상을 떠난 뒤 1913년에는 테페 남작의 딸이자 예술가인 나일 드 테페 폰 후른홀츠와 재혼했다.

그는 1889년 공화정 선포에 가담했으며, 1893년에는 브라질 해군이 주도하여 플로리아누 페이소토크 정부에 맞선 '해군 반란(Armada Revolt)'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벌어지는 과정에도 휘말렸다. 또한 1904년에는 천연두 백신 접종 의무화에 반발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인 '백신 반란'과 관련된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1915년, 보수공화당 지도자 피녜이루 마샤두가 암살되자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스위스로 건너가 생활했다. 1921년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군사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코파카바나 요새 반란'에 연루되어 6개월간 수감되었다. 그리고 1923년 9월 9일, 리우데자네이루주 페트로폴리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르메스 다 폰세카 정부

그는 시민주의(시빌리스트) 진영의 루이 바르보사를 누르고 직접 선거에서 승리하여, 55세였던 1910년 11월 15일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부통령은 벤세슬라우 브라스였으며, 임기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였다.

취임 초기부터 그의 정부는 상파울루의 커피 재배 세력과 미나스제라이스의 농업 세력이 번갈아 대통령직을 차지하던 이른바 '커피 우유 정책(café au lait)'의 위기 속에서 출범해야 했다.

또한 집무 초반부터 수병들이 받던 비인격적 대우에 항거한 '채찍 반란(Revolta da Chibata, 1910)'이라는 수병 반란에 직면했고, 이후에는 승려 조제 마리아가 이끌던 남부 지역의 '콘테스타두 전쟁(1912~1916)'까지 겹치면서 내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군과 정계 양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대위, 중령(1894), 장군(1900), 원수(1906)로 계급을 거쳐 올랐으며, 대통령 궁정무관장을 지낸 뒤 아폰수 페나 정부(1906)에서 육군장관을 맡아 징병제를 도입하고 브라질 육군 개혁을 추진했다. 아울러 최고군사법원(STM) 장관도 역임했다.

이른바 '구원 정책(Política das Salvações)'은 시민주의 운동에 맞서는 성격을 띠었으며, 주 정부에 대한 연방 개입을 '과두 지배 타파'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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