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델핌 모레이라: 브라질 제10대 대통령의 짧지만 격동의 임기

델핌 모레이라(Delfim Moreira)는 브라질의 제10대 대통령으로, 1918년 11월 15일부터 1919년 7월 28일까지 재임했습니다.

재임 기간이 매우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시기는 옛 고이아스 주에서 일어난 무력 분쟁, 전국 곳곳의 파업,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라는 격변의 순간들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습니다.

델핌 모레이라: 브라질 제10대 대통령의 짧지만 격동의 임기

생애

델핌 모레이라는 미나스제라이스주 출신으로, 마리아나 신학교에서 수학한 뒤 상파울루 법학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그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연방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하며 정치 경력 전체를 이 주에서 쌓아갔습니다.

'커피 우유 정책(카페 코 레이테, café com leite)'의 정치 논리 속에서 델핌 모레이라는 1918년 선거에서 호드리게스 알베스(Rodrigues Alves)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호드리게스 알베스는 취임식을 앞두고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에 취임하지 못했습니다.

1891년 헌법에 따르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계승할 수 있는 경우는 현직 대통령이 임기 2년을 넘긴 뒤 사망했을 때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델핌 모레이라는 새로운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대통령직을 임시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이아스 분쟁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 사이, 오늘날 토칸친스주에 해당하는 상조제두두루(São José do Duro) 지역에서 지역 유력자들 간의 갈등이 폭발했습니다. 이 사건은 '아홉 명의 학살(Massacre of the Nine)' 또는 '두두 학살'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분쟁의 발단은 상속 문제를 둘러싼 불화였습니다. 델핌 모레이라 정부가 개입했음에도 관련 가문들은 납치 사건을 감행했고, 경찰 역시 아홉 명의 용의자를 통나무에 묶는 등 자의적인 체포를 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브라질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던 지역 유력 세력, 소위 '콜로넬(coronelismo)'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파업

1917년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최초의 총파업에 힘입어, 당시 산업 전반의 여러 부문에서 파업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위는 경찰과의 충돌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델핌 모레이라 정부의 노동 정책은 이전 정부들의 노선을 그대로 따랐으며, 파업은 경찰에 의해 강경하게 진압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 최초의 노동 관련 법률은 에피타시우 페소아(Epitácio Pessoa) 정부(1919~1922) 시기에야 비로소 제정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1917년 4월, 독일 잠수함이 프랑스 연안에서 브라질 선박을 공격했습니다. 이에 브라질은 비교전 국가라는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브라질은 간호사, 의사, 비행사 등 지원 인력을 유럽에 파견해 연합군을 도왔으며, 브라질 군함은 지브롤터 해협을 순찰하는 임무도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델핌 모레이라 정부는 1919년 베르사유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참여할 브라질 대표단을 조직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에피타시우 페소아가 이끈 브라질 대표단은 독일이 초래한 물질적 피해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정부 말기와 생애의 마지막

델핌 모레이라는 재임 중 브라질 민법전 개편 작업과 아크리 주의 행정 구조 정비 사업도 추진했습니다.

1919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에피타시우 페소아가 승리하자, 델핌 모레이라는 다시 부통령직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1920년 7월 1일, 브라질 부통령 재임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