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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타시오 페소아: 브라질 제11대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유산

에피타시오 페소아(Epitácio Pessoa)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브라질의 제11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인물입니다. 그의 집권 시기는 이른바 '구 공화국(República Velha)'이라 불리는 시대에 해당하며, 미나스제라이스 출신의 델핑 모레이라(Delfim Moreira)의 짧은 임기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과두 세력이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던 소위 '커피와 우유 정치(café com leite)' 체제를 깨뜨린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대통령 외에도 에피타시오는 저명한 법학자이자 법학 교수였으며, 파라이바 문인 아카데미(Academia Paraibana de Letras) 제31번 좌석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에피타시오 페소아: 브라질 제11대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유산

생애

에피타시오 린돌포 다 실바 페소아(Epitácio Lindolfo da Silva Pessoa)는 1865년 5월 23일 브라질 북동부 파라이바주의 움부제이루(Umbuzeiro)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7세 때 부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당시 페르남부쿠 주지사였던 숙부 바론 드 루세나(Barão de Lucena)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페르남부쿠 기니지우(Ginásio Pernambucano)에서 수학한 뒤, 또 다른 숙부였던 헨리크 드 루세나(Henrique de Lucena)의 발자취를 따라 페르남부쿠 연방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여 1886년까지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헤시페(Recife) 법학부에서 법률을 강의했고, 곧 리우데자네이루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훗날 그는 유럽에서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곳에서 마리아 다 콘세이상 지 망수 사이앙(Maria da Conceição de Manso Saião)과 결혼했습니다. 말년에는 심장 질환과 악화된 파킨슨병을 앓다가 1942년 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주 페트로폴리스(Petrópolis)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치 경력

에피타시오는 폭넓고 강력한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봉자딩(Bom Jardim) 검찰관을 시작으로 연방 하원의원, 파라이바 상원의원, 법무부 장관, 연방 최고법원(STF) 판사, 검찰총장, 법무·내무부 장관, 산업·교통·공공사업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 판사로도 활동하다 1930년까지 재직했습니다.

대통령 선출과 취임

1918~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브라질 대표단을 이끌며 프랑스에 머물던 중에도, 에피타시오는 미나스 공화당(PRM)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의 상대는 저명한 법조인 루이 바르보자(Rui Barbosa, 1849~1923)였습니다. 개표 결과 에피타시오가 286,373표를 얻어 116,414표를 득표한 바르보자를 큰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1919년 7월 28일 귀국과 함께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집권 시기의 위기와 정책

그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방금 끝난 참후였습니다. 그의 정부는 사회·정치·경제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에 직면했고, 이는 파업과 군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테넨티즘(tenentismo)' 운동이 두드러졌는데, 1922년 7월 5일 코파카바나 요새의 18인 반란(Revolta dos 18 do Forte de Copacabana)이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 반란은 공화국 전 대통령 에르메스 다 푼세카(Hermes da Fonseca)의 체포에 불만을 품은 부사관과 병사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커피 농장주들의 불만에 직면한 에피타시오는 지출 확대 정책을 도입하는 한편, 가뭄에 시달리던 북동부 지역을 구제하기 위해 철도 건설, 우물, 댐 등 다양한 인프라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약 500km의 철도 노선을 새로 놓아 내륙 오지 접근성을 개선했고, 남부 지역에도 1,000km가 넘는 철도를 건설하는 등 전국적인 물류망 확충에 힘썼습니다.

1930년 혁명과 은퇴

에피타시오는 1930년 게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1882~1954)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즉 '1930년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이 혁명으로 당시 대통령이던 바싱투 루이스(Washington Luís)가 축출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조카이자 부통령 후보였던 조앙 페소아(João Pessoa, 1878~1930)가 변호사 겸 언론인 조앙 두아르치 단타스(João Duarte Dantas, 1888~1930)에게 암살되는 비극을 겪었고, 이 사건은 바르가스가 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카의 죽음에 깊이 절망한 에피타시오는 점차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1922년 11월 15일 대통령 임기를 마쳤으며, 그 뒤를 이어 미나스제라이스 출신의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Artur Bernardes)가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국정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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