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커 혁명(Acre Revolution)은 1902년 8월 6일부터 1903년 1월 24일까지 진행된 무력 분쟁으로, 그 핵심에는 고무 사업의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브라질의 고무 생산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국내외 시장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고무 농장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 사업을 주도한 것은 브라질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점차 아마존 북동부 지역, 즉 현재의 아크리주에 해당하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지역은 1867년 11월 23일 아야쿠초 조약(Treaty of Ayacucho) 체결 이후 볼리비아 영토로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에이커 혁명이란?
더 많은 고무 농장과 부를 찾아 1870년대부터 최소 2만 명의 브라질인이 이 지역 고무 농장의 노동력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주민의 상당수는 가뭄을 피해 떠난 북동부 출신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아마존과 파라(Pará) 지역 사업가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리비아 정부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브라질인의 규모를 외면한 채, 1901년 12월 17일 해당 지역을 민간 회사인 볼리비안 신디케이트(Bolivian Syndicate)에 임대했습니다.
이 결정은 벨렝과 마나우스의 고무 재벌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곧바로 아크리의 정치적 자치 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의 지도부는 가우초 출신 혁명 지도자 조제 플라시두 드 카스트루(José Plácido de Castro)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무 채취 노동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으며, 이들 다수는 강제로 징집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제 플라시두 드 카스트루는 1902년 8월 6일 샤푸리(Xapuri)를 점령하고 볼리비아 관리 후안 데 디오스 바레토스(Juan de Dios Barretos)를 축출하며 무장 저항의 신호탄을 올렸습니다. 혁명은 1903년 1월 24일 푸에르토 알론소(Puerto Alonso) 함락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페트로폴리스 조약
같은 해 11월 17일, 페트로폴리스 조약(Treaty of Petrópolis)이 체결되어 새로운 국경이 확정되었고, 아크리 영토가 브라질로 공식 이관되었습니다.
조약 조건에 따라 브라질은 약 18만 1천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자국 영역으로 편입했으며, 그 대가로 볼리비아에게 파라과이강 우안 723km², 카르세레 호(Lagoa do Cárcere) 인근 116km², 만디레 호(Lagoa Mandiré) 인근 20km², 과이바 호(Lagoa Guaíba) 남안 8.2km²의 땅을 할양했습니다.
배상과 보상
브라질은 또한 자국 영토 내에서 산투 안토니우 다 마데이라(Santo Antônio da Madeira)와, 베니강과 마모레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빌라 벨라(Vila Bela)를 연결하는 철도, 이른바 '마드 마리아(Mad Maria)' 건설을 약속했습니다.
이 철도의 목적은 볼리비아산 고무의 수송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브라질은 볼리비아에 200만 파운드 스털링을 배상금으로 지급해야 했습니다.
결과와 의의
에이커 혁명은 사회 기반의 정치적 변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역사에는 고무 농장 독점권과 브라질·페루·볼리비아 간 영토 경계를 둘러싼 고무 세력의 반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무 채취 노동자들은 군인으로 동원되었지만, 고무 값은 턱없이 낮게 책정되었고 사업가들은 생필품에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부과하며 이들을 예속시켰습니다.
혁명 이후 아크리는 1904년 브라질의 연방 직할구로 편입되었고,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1962년에야 정식 주(州)인 아크리주로 승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