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디레타스자(Diretas Já): 브라질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으려던 국민 운동

디레타스자(Diretas Já, ‘지금 당장 직접 선출하라’)는 브라질 대통령 직접 선거 재개를 목표로 삼았던 대중적인 정치 운동이었습니다.

디레타스자 운동은 1983년 5월에 시작되어 1984년까지 이어졌으며, 수많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수백만 명의 국민을 동원했습니다.

정당, 시민사회 인사, 예술가,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대중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직접 선거는 1989년에야 실현되었습니다.

즉,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직접 선출된 1960년 10월 3일 이후 무려 29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디레타스자(Diretas Já): 브라질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으려던 국민 운동직접 선거를 요구하는 집회. 상파울루 프라사 다 세(Sé)

핵심 요약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본격화된 당시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1964년 쿠데타로 시작된 군정은 유권자가 대통령과 주지사를 직접 선택할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쿠데타 이후 국민의회는 문을 닫았고, 대통령과 주지사의 선출은 군부 세력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1967년 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간접 선거'입니다. 1979년부터 군정은 사면법(Amnesty Law)을 계기로 민주주의 회복 과정을 시작합니다.

조앙 바프티스타 피게이레두(João Baptista Figueiredo) 장군은 군사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으며, 국가의 민주화가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방침을 세웠습니다.

1982년에야 비로소 주지사 직선제가 재개되었습니다. 이 시기 브라질에는 야권 정당이 넷 있었습니다.

PMDB(브라질 민주운동당), PT(노동자당), PDT(민주노동당), 그리고 PTB(브라질 노동당)입니다.

단테 데 올리베이라 수정안과 디레타스자의 시작

디레타스자(Diretas Já): 브라질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으려던 국민 운동디레타스자 수정안의 발의자 단테 데 올리베이라 의원

직선제 실현을 위해 마토그로소(Mato Grosso) 출신 하원의원 단테 데 올리베이라(Dante de Oliveira)는 1983년 헌법 수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제안에는 선거인단 폐지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통과될 경우 직접 투표는 1985년 선거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습니다.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 중 한 명은 연방 하원의원 울리스스 기마랑이스(Ulisses Guimarães)였습니다. 그는 1983년 5월 고이아니아(Goiânia) 강당에서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이 모임이 전국을 휩쓴 집회 열풍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디레타스자 운동은 군정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무능에 대한 브라질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결과물이었습니다.

1983년 인플레이션은 211%에 치솟았고, 막대한 외채는 국가 재정의 큰 부분을 잠식했으며, 석유 파동은 투자자들을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대통령 계승 논쟁이 한창이던 1984년 1월, 피게이레두 장군은 차기 대통령 선출 과정에서 손을 뗐습니다. 그의 철수는 PT가 주최한 올린다(Olinda) 집회와 쿠리티바(Curitiba) 집회가 열린 지 며칠 뒤의 일이었습니다.

운동을 주류 언론에 알리기 위해 사용된 전략은, Rede Globo 방송의 '조르날 나시오나우(Jornal Nacional)' 프로그램 광고 시간에 광고 삽입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1월 5일 쿠리티바 집회에는 3만 명이 모였습니다.

이후 1월 14일 캄보리우(Camboriú), 1월 20일 살바도르(Salvador)에서도 집회와 행진이 이어졌으며, 각각 3,000명과 15,000명이 참여했습니다. 1월 25일 상파울루 프라사 다 세에서 열린 집회에는 20만 명이 몰리면서 대중적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 행사에는 직선제 찬성 진영의 핵심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 주지사 레오넬 브리졸라(PDT-RJ), 울리스스 기마랑이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등이 참석했습니다.

치코 부아르크(Chico Buarque), 밀턴 나시멘투(Milton Nascimento), 페르난다 몬테네그루(Fernanda Montenegro) 같은 배우와 음악가들도 무대에 올라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브라질 전역에서 대규모 집회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은 거리 시위뿐 아니라, 단테 데 올리베이라 수정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표결 동향도 실시간으로 주목했습니다.

2월에는 프라사 다 세에 '디레타스 점수판(Placar das Diretas)'이 설치되었고, 수도에서 열릴 표결을 함께 지켜보기 위한 카라반인 '브라질리아 행진'도 시작되었습니다.

디레타스자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모인 행사는 4월 10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렸습니다. 단 6시간 동안 무려 100만 명이 칸델라리아(Candelária) 집회에서 직접 투표 재개를 지지하는 연설을 경청했습니다.

결국 좌절된 수정안

정치인과 예술가들은 단테 데 올리베이라 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진 5월 25일까지 여러 행사에서 함께 무대에 섰습니다.

표결 당일 국회는 격렬한 움직임과 긴장으로 가득 찼지만, 결국 하원은 수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해 선거에는 국민의 직접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민주화와 디레타스자의 유산

수정안 부결 이후, 운동의 주축 세력은 군사 정권 종식을 위한 협상에 나섰습니다. 북동부 지역 주지사들의 공작 끝에 탄크레두 네비스(Tancredo Neves)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상파울루 출신 후보 파울루 말루프(Paulo Maluf)와 내부 경쟁을 벌였습니다.

탄크레두 네비스의 간접 선거는 1985년 치러졌으며, 1964년에 시작된 군사 독재의 막을 내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탄크레두는 취임 전에 세상을 떠나 대통령직을 수행하지 못했고, 그의 뒤를 이어 조제 사르네이(José Sarney)가 정부를 이끌게 됩니다.

'얼룩진 얼굴' 운동과 콜로르 퇴진

사르네이 정부 말기인 1989년, 오랜 만에 대통령 직접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페르난두 콜로르 드 멜루(Fernando Collor de Mello)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콜로르 정부는 수차례의 부패 혐의로 시달렸고, 이에 따라 대규모 대중 시위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운동은 '카라스 핀타다스(얼룩진 얼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콜로르는 탄핵 절차 도중 사임했고, 부통령 이타마르 프랑코(Itamar Franco)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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