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헤르조그(Vladimir Herzog)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유대계 브라질 언론인입니다.
그는 1975년 10월 25일, 브라질 군사정권 시기에 고문 끝에 살해당했으며, 이 사건은 훗날 브라질 민주화 운동이 다시 일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애
블라디미르 헤르조그는 1937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오시예크에서 블라도 헤르조그(Vlado Herzog)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현재 이 도시는 크로아티아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부모인 조라(Zora)와 지그문트 헤르조그(Zigmund Herzog)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로 피신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블라디미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가족은 전쟁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이후 새 삶의 터전으로 브라질을 선택했습니다.
헤르조그의 외조부모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되었고, 친조부모 역시 유고슬라비아의 절멸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족은 브라질로 건너가 리우데자네이루에 상륙한 뒤 상파울루에 정착했습니다.

1950년 헤르조그는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 아르헨티나에서 영화 과정을 마친 후에는 영화 분야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가 참여한 작품 중에는 1963년 개봉한 마리바스(Maribás)가 있습니다.
또한 1965년 축구 언더그라운드(Soccer Undergrounds) 작업에 참여했으며, 그가 사망한 후에야 완성된 도라문두(Doramundo) 제작에도 몸담았습니다.
1958년에는 오 에스타두 지 상파울루(O Estado de S. Paulo) 신문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당시 은행 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 사회과학을 전공하던 클라리스 샤베스(Clarice Chaves)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1964년 군사 쿠데타로 인해 부부는 이듬해 런던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1965년 블라디미르 헤르조그는 BBC의 대(對)브라질 방송 업무를 맡기 시작했습니다.
런던 체류 중에는 두 자녀 이보(Ivo)와 안드레(André)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그는 또 다른 영화 과정을 공부했고, 아내는 1968년 자녀들과 함께 먼저 브라질로 돌아갔습니다. 블라디미르의 귀국은 AI-5(제5차 기관법) 발효 소식과 그 여파 때문에 2주간 늦어졌습니다.
1970년부터는 저널 비전(Vision)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SNI(국가정보국)의 승인을 받은 후에는 TV 문화(TV Cultura)의 보도국장 직책도 겸임했습니다.
죽음
헤르조그는 CODI(내부방위작전센터) 산하 DOI(정보작전분견대), 이른바 DOI-CODI 본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기관은 육군에 소속된 곳으로, 군정 시기 정치범들을 수용하고 심문하던 곳이었습니다.
헤르조그는 주(州)립 방송국인 TV 문화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PCB(브라질 공산당) 관련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의 근절은 AI-5(제5차 기관법)의 뒷배를 등에 업은 군부의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언론인은 하룻밤 내내 고문을 당한 끝에 아침에 숨을 거뒀습니다. 사망진단서에는 사망 원인이 '목매달아 자살'로 기록되었습니다. 가족이 수정된 진단서를 받게 된 것은 무려 2013년에야 가능했습니다. 수정된 진단서는 헤르조그가 DOI-CODI 육군 본부에서 입은 부상과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했다고 명시했습니다.
사회적 파장
블라디미르 헤르조그는 '자카르타 작전(Operation Jakarta)'의 일환으로 DOI-CODI 본부에 출석하라는 군부의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 목적은 국영 기관 내부의 공산주의 활동 가능성에 대해 심문받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출두한 언론인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심문 도중 부상으로 사망했습니다. 같은 곳에 수감되어 있던 다른 언론인들은 그의 비명을 들었고, 훗날 이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자살'이라는 사망 원인은 가족에 의해 즉각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1978년, 브라질 국가는 국영 기관 시설에서 언론인이 사망한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판결받았습니다. 이 판결은 에르네스투 가이젤(Ernesto Geisel) 정부가 예고한 브라질의 정치적 재개방 흐름과 맞물려 큰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브라질의 긴 군사독재 기간이 이어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국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블라디미르 헤르조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에큐메니컬 행사가 상파울루의 세 주요 종교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파울루 에바리스투 아르스(Dom Paulo Evaristo Arns) 추기경, 장로교 목사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 랍비 헨리 소벨(Henry Sobel)이 함께한 추도식에는 8천 명이 참석했습니다. 행사 전 과정은 군인들의 감시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군정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개방에 나선 것은 1979년 사면법(Amnesty Law)이 시행되면서부터였습니다.
클라리스 헤르조그
사회과학자 클라리스 헤르조그의 헌신은 남편의 죽음 진상 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클라리스는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알디르 블랑크(Aldir Blanc)와 주앙 보스코(João Bosco)의 노래 술취한 자와 외줄타기 광대(The Drunk and the Tightrope Walker)에도 등장합니다.
울어라
우리 조국, 자애로운 어머니여
마리아들과 클라리스들이 울고 있다
브라질의 땅 위에서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찌르는 듯한 고통이
헛되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블라디미르 헤르조그 연구소
2009년 6월, 언론인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블라디미르 헤르조그 연구소(Instituto Vladimir Herzog)를 설립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목표는 민주주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헤르조그가 남긴 가장 잘 알려진 말은 연구소가 보존하고자 하는 인도주의적 이념을 잘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사실
- 경찰이 사망 원인을 자살로 명시한 진단서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랍비는 그를 이스라엘 묘지의 자살자 구역에 안장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 1979년, 민주주의에 헌신하는 언론·미디어 종사자들을 위해 '블라디미르 헤르조그 사면·인권상(Premio Vladimir Herzog)'이 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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